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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완도 근현대사 인물열전 3]완도 항일교육의 아버지, 소남 김영현 선생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4.02 14:23
  • 수정 2017.04.0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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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항일교육의 아버지, 소남 김영현 선생

일제 강점기 완도의 많은 항일운동인사들을 양성한 교육사상가이자 항일애국지사인 소남(小南) 김영현 선생은 1883년 고금도 청룡리에서 심재 이도재 공과 함께 완도 설군의 일등공신을 담당한 침천 김광선 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선 선생은 고금면 청룡리에 거주하면서 당시 이곳에 유배와 있던 이도재 공을 만나 그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의 아들인 김영현 선생도 어려서 이도재 공에게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이도재 공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유배에서 풀려 한양으로 돌아갔고, 전라관찰사가 되어 내려와서 완도 설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도재 공이 완도군을 설치하기 위해 고금도를 다시 찾았을 때 김광선 선생 등이 영접하였으며, 김광선 선생은 군 설치 이후 향도유사를 맡았다.

이미 고금도 유배 당시 이도재 공의 문하생으로 수업을 받아 나라의 동량지재(棟梁之材)라고 불렸던 김영현 선생은, 1905년 장성한 나이가 되자 당시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등 요직을 지내고 있던 이도재 공을 찾아 상경하여 그의 소개로 융희학교 제1기로 입학해 1909년 졸업했다. 1910년 선생은 광주에 내려와 광주교원강습소를 수료한 뒤 고금면 회룡리에 내려와 1912년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 약 8년간 신교육을 실시했다.

3.1운동이 있는 다음해인 1920년 완도에서는 ‘완도상회’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8월17일 완도공립보통학교에서 열린 완도청년회 석상에서, 고금면 출신으로 동아일보 목포지국에서 일하던 김영현 선생의 한 발언에서 비롯됐다. 개성시에서 일본인들의 상품불매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청년회원 20여명을 상대로 “우리 완도는 완도인의 완도이지 타인의 완도가 아니다. 따라서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스스로 교육·경제의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이룩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는 뒷날 검찰이 그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 관리 및 일본인을 배척하도록 교사·선동하였다”는 혐의를 씌운 근거가 됐다.

그는 또 이 자리에서 “완도는 타군에 비해 물가가 비싸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회원을 중견으로 하여 완도소비조합을 조직하고 물화를 저가로 공급하고, 이익배당을 목적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청년회원들은 모두 동의하였고, 김영현 선생은 이후 1주당 2원으로 하고 출자 상한을 15주로 하여 출자자를 모집했다. 하지만 출자자는 예상과는 달리 말지 않았고, 결국 소비조합의 구상은 물거품이 됨에 따라 그는 소비조합 대신 완도상회라는 잡화상을 열었다. 출자자는 김봉현 외 35명이었으며, 출자액은 280원이었다. 그는 1920년 9월1일 개업한 완도상회의 주임이 되어 잡화 판매를 개시하였으며, 박리 공급을 표방하고 특히 출자자들에게 완도상회의 이용을 촉구했다. 그런데 이같은 김영현의 소비조합, 완도상회 사업이 경찰과 검찰에 의해 일본상품 불매동맹으로 간주되어 구속 기소된 것이었다.

그해 11월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김영현 선생은 징역 3월을 선고받았다. 김영현 선생은 이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1년 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았다. 대구복심법원은 김영현이 “정치적 변혁을 목적으로 음으로 양으로 일본인 관리 내지 일본인을 배척하고, 비매동맹을 결성, 민중들에게 조선독립사상을 고취 선동하고 안녕질서를 방해한 고의적 소행이 있었다고 인정할만한 증거거 없다”고 판시한 것이다.

징역살이에서 풀려나자 그는 대구감옥에 있으면서 알게 된 상주 출신 조태현을 따라 상주 낙동면 운평리에서 낙운사숙이라는 일종의 개량서당을 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가 급증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대지주인 조태현 부자의 간청과 협찬으로 1921년 조씨가의 재각 양진당(養眞堂)을 개조하여 조명강습소를 열게 됐다.

당시 상립조명강습소 개교식에서 김영현 선생이 8번째 연사로 등단하였는데, 그 연설의 내용이 가히 파격적이었다. “제가 ‘양반의 머리를 해부한다’는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조금 과격한 말을 하여도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양반들은 오늘날 나라의 위태로움에는 관심이 없고, 조상을 잘 모시기 위해 고봉산천의 명당을 찾아다니느라 재물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명당은 고봉산천에 있지 않고 바로 이 학생들의 배움의 터 이곳이 명당이며, 양반은 이 명당 이곳 조명강습소 이곳에서 배운 학생들이 양반인 것입니다“ 그만큼 미래세대를 위한 후진양성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았음을 반증하는 내용이었다.

김영현 선생은 줄곧 나라를 되찾는 것도 민족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에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조명강습소 학생수는 2백여 명에 달해 이를 갑·을·병 3개 반으로 나누어 교육을 하게 됐다. 3년 동안 이곳에서 제자들을 배출시켜서 그곳 지역의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활동케 했다. 그는 이곳에서 경북 선산 백진 이씨가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1924년에는 일본경찰들의 고문으로 인한 늑막염이 재발하자 치료차 제자들과 지역민들에게 아쉬운 작별을 하고 귀향하게 됐다.

고향 완도로 돌아와 그는 평생의 소원이던 군외면 중심지 교인동에 지역민의 협찬과 선생께서 십년간의 봉급을 아껴 저축한 돈으로 1925년 사립교인학교를 설립해 후진교육에 공헌했다. 교원으로 김창선 ·오석균·이홍용·황동윤·김생기·김동섭·이두성·정남호·이학용 등을 초빙돼 학생들을 가르쳤다.

나라 없는 서러움을 안고 1927년 교인사립학교 학생이 늘어나자 제자들의 앞날을 위해 해남학생들을 이웃 해남군 북평면 서홍리에 동명학원과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동광학원을 그곳 애국지사 강기동 선생의 협찬으로 설립하여 사랑하는 제자들의 학업을 계속케 하였다. 조국광복을 위함은 오직 후진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일념이었다. 제자들에게 신학문과 민족사상을 주입시켜 항일운동의 주동인물로 양성시켰다.

그러나 일제경찰들은 선생을 사회주의자를 양성시킨 주모인사로 지목하고 일거일동을 감시하여 심지어는 수업시간에도 때를 가리지 않고 참견하는 등 많은 박해를 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경찰은 상부의 지시라 하며 1934년 설립한지 11년만에 사립교인학교를 폐교하라는 일방적 명령을 내렸다. 교인학교는 1934년 일제에 의해 강제폐쇄당했다.

이같은 명령에 선생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굳은 일념으로 중단할 수 없어 “나라는 빼앗겨도 정신만은 뺏기지 않는다”며 제자들의 앞날을 위해 교인학교를 뜯어서 군외면 불목리로 옮겨 동명학교를 개교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여 못쓰게 하였기 때문에 군외영창간이학교라 개명했다. 이곳 역시 1943년 이축한지 9년만에 재차 폐교조치를 당했다. 도중에 김영현 선생은 1927년 김상근이 설립한 완도중학원에서 1938년경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김영현 선생은 한평생을 고향 완도에 대한 발전과 후학에 대한 교육에 평생을 받쳤는데, 초기 고금보통학교부터 사립 교인학교 학생들이 이후 항일운동에 적극 나서게 된다. 잠시 제자들의 항일운동을 관련자들을 거론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금의 이기홍, 박노호, 이흥세, 김옥도, 최창규 등이 전남운동협의회에 활동했으며,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교인사립학교 출신 황상남, 문승수, 오문현과 고금출신 정남균, 유치오, 박노기, 이기홍 등이 함께 맹활약하였고, 여수수산학교 독서회 학생운동에는 교인사립학교 출신으로 조병호가 오놀보, 김양호 등 고금보통학교 출신들과 함께 활약했다. 1920년 고금 보통학교 독립만세 사건으로 정학균, 이수열, 이현열, 배명순, 홍철수, 김천녕 등이 참여하고 있다. 또한 독립운동사에 성명이 언급되지 않지만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람까지 찾는다면 더욱 많은 김영현 선생의 제자들이 가담해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일제경찰들이 선생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지만 서기 1942년 말경에 완도 군외면 선착장에 명선욱 첨사공적비 철비를 부수어 당시 대동아 전쟁에 사용할 무기로 만들기 위해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야적되어 있는 것을 군외면 갈문리 배장사와 함께 일제경찰의 눈을 피해 가면서 근처 황진리 조카 김내호 집에 옮겨두었다. 또 선생은 고마도 깊은 섬으로 피신하면서 귀중한 역사책 등과 가리포첨사기록부를 마루 밑 땅속에 숨겨 8.15광복과 동시에 가지고 나왔다.

 선생은 해방 후 완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으며, 1955년 자신의 ‘청해비사(淸海泌史)’를 간행했다. 그가 저술한 ‘청해비사’는 완도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사라질 뻔한 완도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는 책이다. 대표적인 것이 창의사 허사겸에 관한 내용이고, 그 밖에도 장보고대사, 송징장군, 구사직, 이응표, 이영남, 김태희, 이상돈, 채풍원, 허조, 홍병덕, 이종상, 명선욱, 장익진 등의 완도가 알아야 할 인물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1960년 12월 29일자 문교부장관 오천석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으며, 1962년 오석균 선생의 연원으로 원불교에 입교했다. 선생은 농원 2만평을 원불교에 헌납했는데, 불목리 원불교 소남훈련원이 그렇게 세웠졌다. 해신드라마를 위한 불목리 세트장을 건립할 때 그의 아들이 일부 땅을 내놓기도 했다. 선생은 1974년 89세의 일기로 군외면 불목리에서 별세했다.

소남 김영현 선생은 교육자로서 수많은 제자들을 항일운동투사를 양성했지만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제7대 군외면장(1940~1942)을 역임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서원에서 제외돼 있는 상태다. 그의 손자인 김풍호 완도문화원 부원장은 “당시가 태평양 전쟁 바로 전으로 일본이 전쟁물자를 조달하는데 안달하면서 주민들의 핍박과 착취가 극에 달했을 때다. 소신이 뚜렷하고 덕망이 있던 할아버지에게 주민들이 면장을 해서 핍박과 착취를 조금 덜 당하게 해달라는 하소연이 있었다”고 면장을 맡은 배경을 설명했다.

선생의 역사적 족적이 확연한데도 그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항일애국인사들의 독립유공자 서원에 대해 당시 보훈처에서는 해방 이후 뚜렷한 활약을 정리해 추가로 신청을 해달라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앞으로 후손들의 과제는 군외면장을 역임하게 된 배경과 해방 이후 선생의 활약을 정리해 독립유공자로서, 완도항일교육의 일등공신으로서 대우를 받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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