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완도의 어른이 점점 사라져 갈 때, 지역공동체는?

[완도논단]김정호 본보 발행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4.01 15:32
  • 수정 2017.04.01 15:45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정호 / 본보 발행인

엘리트, 어떤사회에서 우수한 능력으로 지도적역할을 하는 사람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사용하는 인터넷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의 ‘엘리트’ 사전적 의미가 흥미롭다. 먼저 다음은 어떤 사회에서 우수한 능력이 있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네이버에서는 사회에서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사람. 또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두 사이트는 엘리트를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전유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다. 완전히 다른 용법을 품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판·검사나 의사를 엘리트로 분류한다. 그들은 가기 힘든 의대나 법대에 입학해서 법조인과 의사가 되는 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서 다른 학생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엘리트로 불릴 수 있는 필요조건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인권이나 민주주의적 가치 역행 자신의 밥그릇만 지키는 엘리트
하지만, 다음에서 말한 자기 분야에서 우수하거나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해서 곧바로 네이버에서 말한 엘리트가 되진 않는다. 인권이나 민주주의적 가치를 역행하는 법조인은 제대로 된 사회지도자가 될 수 없고, 밥그릇 지키기에 눈이 멀어 국민 건강을 아랑곳하지 않는 의사를 사회지도자라고 일컬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구속 수감되어 있는 박근혜 정권 김기춘 비서실장이나 우병우 민정수석, 은 다음에서 말한 범주에 속한 엘리트고, 사회전체의 공익을 우선한 정치가나 시민운동가는 네이버에 속하는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말한 엘리트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안됐다고 할 수 있다. 공적 책임을 떠맡아야 비로소 사회 구성원모두가 충족하는 엘리트로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애초 다음과 네이버의 ‘엘리트’의 해석은 출발선이 다르다고 봐야한다.
고귀한 임무'라는 뜻을 가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베풀다는 자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전선으로 달려 나가는 의무도 강조했다.
법조인 출신 김기춘이나 우병우는 엘리트의 필요조건은 갖췄으나, 충분조건은 갖추지 못한 인물들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의 자세보다 군림하고 억압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대통령선거로 분주하다.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대선 후보와 함께 소위 엘리트를 자처하고 나선 차기 지방선거를 겨냥한 인물들이 눈에 자주 띤다. 엘리트를 꿈꾸는 인물들은 넘쳐나지만 네이버에서 말한 엘리트라고 규정할 인물은 드물다. 오랜 옛날이 아니더라도 일제강점기 때를 보자.

완도엘리트, 송내호 정남국 선생 오늘날엔 완도를 가꾸는 사람들
항일운동의 성지 소안 사람들은 자신의 사익을 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국의 독립과 지역 공동체를 우선해 살았다. 송내호 선생과 정남국 선생이 그렇다. 대표적인 완도의 엘리트인 것이다.
또 많이 배운 학식과 지식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보다 굳이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또 정치인, 의사, 변호사, 교수 같은 고소득 직종이 아니더라도, 완도라는 울타리를 가꾸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진정한 엘리트다. 필자는 지역에서 엘리트를  어른이라 바꿔 말한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이 아니라 어른 ‘구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실이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지역공동체가 올바르게 운영되도록 하는 역할을 말한다. 이런 어른의 역할은 올바른 역사와 전통을 만든다.

우치다타츠루 "절망적인 상태서 발아래 유리조각을 줍는 사람"
'사회수선주의자' 혹은 '리버럴한 보수'라고 칭하는 우치다 타츠루는 <어른 없는 사회> 머리말과 본문에 이렇게 썼다.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을 때는, 먼저 내 발아래 유리조각을 주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고 무너진 대학 건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쭈그리고 앉아 첫 유리조각을 주우면서 제 스스로 정한 규칙입니다. 아마 어디 다른 곳에서도 저와 마찬가지로 발아래 유리조각을 주워드는 일부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터입니다."
"가족과 이웃을 지원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는 사회계약에 적혀 있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의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더 많은 부담을 떠안습니다. 도로에 떨어져 있는 빈 깡통을 줍는 것과 같습니다. 내 일이 아니니 그대로 방치한다 해도 누구도 비난할 수 없지만 그 깡통을 줍는 것이 내 일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도로는 깨끗해집니다. (중략) 자신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만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더 많은 일을 기꺼이 떠안습니다."
지역에서 어른이 줄어들 때 우리 곁에서 유리조각을 손수 줍는 사람이 사라져간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완도에서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 삼는 어른이 점점 사라져갈 때, 곤경에 처하는 것은 지역 공동체다.
자기가 태어난 땅의 고민을 자신의 것으로 책임지고 해결하려는 엘리트 의식이 희박해질 때, 완도는 이윤만 추구하는 사람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고, 기회주의자의 천국으로 변할 것이다.
진정한 완도의 어른이 그리운 2017년의 봄이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