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장부가 난세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완도근현대사인물열전 2]완도 항일의 붉은 심장, 송내호·송기호 형제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2.24 12:51
  • 수정 2017.02.24 14:43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안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그 중심에 송내호.송기호 형제가 있었다.


소안도는 일제강점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곳으로 독립군자금 모금과 노농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양성하고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명의 주민 중 8백여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일제하 소안도 항일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으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 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소안도, 일제강점기 항일구국의 횃불을 높이 쳐들다
외딴 섬 소안도에서 이처럼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라는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중화학원’이 ‘사립소안학교’의 모태가 됐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었다. 1920~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백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명에 달한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일의 열기가 짐작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들에게 말을 하지 않는 ‘불언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하지만 해방 후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다. 송내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완도 항일운동의 붉은 심장, 해도 송내호 선생 모습.

 송내호 선생, 동학농민전쟁의 여파 아직 사라지지 않은 1895년 태어나
송내호(1895~1928)와 송기호(1899~1928)는 친형제 간으로 완도군 소안면 비자리 여산 송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가계는 원래 전라북도 여산에서 세거한 양반가문이었는데, 이들로부터 10대조 충의위 어모장군 천종은 임재왜란때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당숙으로 그의 두 아들 박, 욱도 정유재란 때 순국하였는데, 이때 이 가계는 전남 무안군 청계면으로 이주했다. 이들로부터 6대조 운경은 강진군 작천면으로 이사하였고, 5대조 흥담은 한림학사에 올라 이때까지 이 가계는 관직의 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고조 기재 이후로는 관직에 나간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19세기 세도정치의 문란과 사회변동 속에서 이 가계의 관직진출은 막혔던 것이다.

송내호 일가가 소안면 비자리로 이거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송진옥(1832~?)과 아버지 종중(1866~1929) 때였다. 송종중은 4남2녀를 두었는데, 내호와 기호는 각각 둘째, 셋째 아들이었다. 송종중은 참봉 직첩을 가졌고 소안면 면수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에 의해 면수가 면장제로 바뀌면서 그는 면수를 그만두고 비자리 항구에 여각을 차려 생활했다. 바자리 항구는 제주도·목포·부산 등과 일본 오사카를 연결하는 배가 다니는 선박의 요로였다. 따라서 그는 이곳에서 어느 정도의 재산을 보유할 수 있었고, 또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도 민감하였던 듯 세 아들을 각각 서울, 광주, 일본에 유학 보냈다. 또한 그는 1918년말 완도에 귀양 온 신민회 인사 양기탁과도 친교를 가졌으며, 송내호의 항일운동을 뒤에서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면 유지를 아버지로 해서 송내호는 동학농민전쟁의 여파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1895년 8월 12일 태어났다. 그의 아명은 정호요, 호는 해도 또는 태설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총명다재하고 담략이 범상치 않았으며 매사에 충직하고 진실했다고 한다.

송내호의 어린시절 학교공부는 비자리 비동마을에 있던 심황재에 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심황재는 독서실과 서예원 및 학교를 겸했는데, 심황재의 교육을 통해 그는 전통한학을 공부하였고, 서예를 배워 글씨를 잘 썼다. 한학을 이수하던 그는 아버지의 배려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완도에 있는 사립육영학교에 진학하였고, 여기에서 초등과정을 이수했다.

송내호가 태어나 완도에서 초등교육을 받기까지 16년 동안의 시국은 다 아는 것처럼 동학 농민전쟁의 여파, 갑오경장의 추진, 을미의병의 발생,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운동, 대한제국의 성립, 러일전쟁의 발발 등 봉건과 반봉건, 침략과 반침략의 대결이 숨가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경국 일제의 침략성공으로 진행돼 일제는 을미조약, 정미조약 등으로 국권침탈을 감행해 갔고, 대한제국의 운명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 등 국권회복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으나, 이것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같은 의병소탕전이나 신민회 사건 같은 여러 탄압정책에 의해 좌절되었고, 1910년 8월 일제는 마침내 한일합방을 공포해 식민지 무단통치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제의 국권강탈과 그에 대한 국권회복운동의 실패, 일제의 침략으로 소안면수를 그만두고 여각을 운영해야 했던 아버지의 변화 등은, 당시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송내호에게 민감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단행되던 1911년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곧이어 17세의 나이로 서울에 있는 사립중앙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조선총독부를 지척에 둔 사립중앙학교에서 3년간의 중등과정을 이수하고 이 학교를 제6회로 졸업했다. 이때 닦은 그의 학업은, 이후 그가 한, 일, 중, 영, 독, 불어 등 6개 국어에 통달하고 또 중앙의 석학인 유광열, 홍명희 등과 함께 독학삼걸로 꼽힐 정도로 실력을 쌓는데 중요한 토대가 됐다. 뿐만 아니라 졸업 후에는 나팔을 즐겨 불고 철봉과 정구 등 서양 운동을 잘할 정도로 그는 이때 신학문에 열심이었다.

신학문과 서울 애국계몽운동, 송내호 선생에게 큰 영향 줘
신학문과 더불어 서울의 애국계몽운동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다녔던 서울 사립중앙학교는, 1908년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기호흥학회에서 설립한 기호학교와 1909년 유길준·오세창 등 애국계몽운동 인사가 설립한 융희학교가 합해져서 개교(1910)하였던 학교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애국계몽운동계열의 인사가 주도한 서울 중앙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대중에 대한 웅변활동을 위해 서양의 태서웅변집 원서를 항상 휴대하고 다녔으며, 서울에 와 있는 고향의 학우들을 모아 재경완산학우회를 조직해 학생운동에 힘썼다. 후일 수의위친계 게원으로서 대한독립단 전라지단 결성에 참여한 전북 고창출신 김정환도 그의 동급생인 것 등을 보면, 그가 이때 사귄 학우들은 이후 그의 조직운동에 밑받침이 됐다.

1914년 3월, 20세의 나이로 중앙고보를 졸업한 그는 곧장 고향에 내려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그는 교육계몽운동을 시작했는데, 사립중화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학교 설립에 노력했다. 또한 그는 고향의 선배·동지들과 더불어 정치적 비밀결사인수의위친계를 조직하였고, 이를 점차 전라도 일대와 경상도 일원에까지 확대시켰다. 이 조직을 통해 그는 독립군자금을 걷고 계원을 파견하여 해외독립운동을 후원했다. 그리고 1915년 소안의 청소년을 중심으로 배달청년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그는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인근 노화면에 사립학교 건립을 추진해 1916년 노화에 사립영흥학원이 설립되게 하고, 여기에 서 그는 창립교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1910년대 중엽부터 교사.조직운동가로 고향에서 활동 시작
송내호는 암울했던 1910년대 중엽부터 교사로서 또 조직운동가로서 고향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는 투철한 민족의식과 더불어 정열적인 웅변가요 여러 가지 재주를 가진 멋있는 선생이었다. 그의 제자 이월송은 “송내호 선생은 열정적인 천품을 지니고 있었다. 노래와 서도를 좋아하셨고, 나팔과 철볼은 보고 그냥 지나가시는 일이 없었다. 의복과 장신에도 특징이 있으니 ‘시베리아’에 갔을때에 입고 오신 크나큰 오바(따창)을 즐겨 입으시고 신발은 언제나 붉은 키트 편상화만을 신으셨다. 눈에는 이채로운 광채를 발하며 대머리에 말씀을 하시든지 담배를 피우실 적에는 침이 튀어 장주 물뿌리에 흘러내리며, 항상 스스로 도취된 정열가ㅗ 열혈에 감싸여 있고 항상 손에는 책을 떼는 일이 없으며, 칸트 철학을 애독하셨다. 영어와 일어에 능하셨고 독특한 화술과 제스처를 지니고 계셨다”고 하였다. 그는 열정과 신지식을 가지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1918년 송내호는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완도에 내려와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이 무렵 그는 태을교에 가입하여 경향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족운동의 확산에 노려했다. 또한 1918년말 유배되어 온 신민회 간부 양기탁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양기탁과 연락하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그는 배달청년회의 활동을 강화시키는 한편, 만주에 본부를 두고 결성된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국내조직인 전라도 지단 설치의 책임을 맡았다. 대란독립단 사건으로 인해 그는 검거되어 고문과 악형 끝에 1년 형을 선고받고, 검거 이후 도합 1년 6개월의 옥고를 껶어야 했다.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완도 항일운동의 붉은 심장, 송내호 선생
1922년 5월 출옥한 그는 처자와 가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더욱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배달청년회와 수의위친계의 조직을 더욱 확대시켜 유학생을 뽑아 중국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또 북경의 독립운동단체와 간도 용정의 동흥·인진 대성학교 등에 청년들을 보내어 활동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국내에서 모집한 독립군자금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전달하였고, 양기탁 등과의 친교를 통해 신민회 간부들이 세운 만주의 무관학교에서 총기와 탄약을 구하여, 전남·북에는 동서 정남국을, 경남·북에는 동생 송기호를 파견하여 무인 포스트를 이용하여 국내 애국인사에게 배포하게 했다.

1923년 초 그는 배달청년회를 통해 서울청년회 등과 더불어 서울에서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최하는 등 활발하게 청년운동을 전개했다. 또 1923년 1월 창립된 조선물산 장려회에서, 그는 조만식·명제세 등과 같이 일화배척운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1924년 3월 그는 노동운동의 조직화를 위해 소안노농연합대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것을 이유로 그해 10월 그는 목포형무소에 구금되어 다음해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받고 1년 수개월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26년 초 출옥 후에도 그는 계속 서울과 완도를 오르내리며 활동하였는데, 6월 소안에서 그는 사상단체인 살자회를 조직하였고, 이 무렵 서울의 제3차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였다. 또 7월에는 서울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위해 조선민흥회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이어 조선 민흥회측 교섭대표로서 신간회 창립에 기여하여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어 활약했다. 1927년(33세) 음력 1월 10일 그는 고향의 위경영의 집에서 단지혈서로서 비밀결사체인 일심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자신은 상경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때 일심단에서는 중국과 일본에 단원을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한편 그해 12월 그는 이른바 비정통파 조선공산당(일명 춘경원당)의 결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 큰별 송내호 죽음, 좌우합작 독립운동 진영에 큰 충격 줘
1928년 2월 그는 전년도에 사립소안학교가 강제 폐쇄당하고 재향 동지 36명이 검거되어 투옥됨에 따라 완도의 독립운동진영의 재건이 요청된다는 일심단의 급보를 받고 귀향했다. 그러나 그간의 활동으로 검거의 대상이었던 그는 귀향 직후 장흥경찰서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기미년(1919) 이래로 세 번 감옥 출입”을 하게 되었던 그는 구속 고문으로써 건강이 악화되고 말았다. 병보석으로 가출옥되었으나, 1928년 12월20일(음력 11월9일) 그는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향년 34세의 나이로 영면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의 큰별 송내호의 죽음은 좌우합작의 독립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신간회 등에서는 그의 장례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치룰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경찰의 압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결국 그의 장례는 신간회 경성지회에서 주관하여 신간회동지장으로 치루어졌다.
 

 
 
독립운동 조직화, 무기배포 등 형 도와 활약한 송기호 선생의 모습.

송내호의 동생 기호는 1900년 12월 20일에 역시 소안면 비자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완도공립보통학교를 나와 광주농업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족보에 “기미삼일독립만세사건징역”이라고 부기된 것처럼, 농업학교 5년 때 광주 학생들의 3·1운동을 적극 주도하였고, 그로 인해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광주 학생들 3.1운동 적극 주도해 1년 징역형 선고 받고 옥살이한 송기호 선생
출감 이후 그는 더욱 형과 뜻을 같이 하여 사립중화학원과 이것을 발전시킨 사립소안학교 그리고 인근 군외사립교인학교, 사립금당학교, 사립신지학교 등에서 교사로서 인재양성과 계몽활동에 종사했다.

또 형 내호가 조직한 수의위친계에 참여하여 영·호남의 독립운동 조직에 힘써으며, 형이 중국에서 구입하여 온 권총(육혈포)을 경상도에 배포하는 무기배포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배달청년회·소안면 노농연합대성회·살자회·일심단 등에서 형과 같이 활약하였다.

송기호 선생, 독립운동 조직화.무기배포 등 형 송내호 도와 활약
한편 1925년 송기호는 신지면 사립학술강습소에서 교사로 있던 중 불온한 사상을 교육했다는 이유로 보안법 위반으로 피감되었다. 이때 그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대구보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이외 수차의 옥고를 치뤘다고 한다.

1927년 그는 활동을 위해 전남 함평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는 여기에서 신간회 함평지회 창립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하였고, 또 안재홍과 더불어 함평에서 사립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러던 중에 수차의 옥고로 인해 폐병이 악화되어 서울로 올라가 소격동 객사에서 치료하다가 돌아와 1928년 3월5일 29세의 젊은 나이로 구속 중인 형보다 몇 개월 앞서 타계하였다.

수차례 옥고로 폐병 악화된 송기호 선생, 향년 29세로 구속 중 형보다 앞서 타계
독립운동가 가정이 대개 그렇듯이 송내호·기호 형제의 가정도 극히 어려웠다. 송내호는 인근 신지면에 거주하는 김정숙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2남3녀를 두었는데, 그가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이 도립운동에 종사하는 속에서 장남 주현은 어려서 죽었다. 여식들은 출가하였으나, 남은 차남 주철은 아버지가 순국하고 이어 다음해 할아버지마저 죽은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동부기방에 갔다가 요절했다. 이로써 송내호는 후사마저 끊기고 말았다. 송기호는 김해 김문삼의 딸인 야아를 부인으로 맞아, 1남 주산을 두었다. 송주산씨는 아버지를 따라 잠시 함평에서 살았으나 아버지를 잃고 다시 완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백부, 조부마저 차례로 잃은 후 가난한 생활고와 일경의 탄압으로 학업을 중단한채 완도물산회사에서 소사를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두 형제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송내호·기호 형제는 전남 완도군 소안면에서 면 유지인 종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안도는 해상교통의 요지이고 지식인의 유배지로 비교적 신문화의 접촉에 용이한 곳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여 대부분 빈곤하였는데, 친일지주에 대한 토지소유권 반환투쟁을 통하여 신문화수용 및 항일투쟁 의식이 고취됐다. 그리고 시대적으로 이 시기는 일제의 침탈에 대한 독립운동이 계몽운동 및 의병전쟁의 연장으로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었고, 또 사회주의 운동이 새롭게 확산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은 소안지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송내호·송기호 형제, 일제침략에 맞서 학생운동부터 다양한 항일활동 전개
이러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이들 형제는 각각 서울중앙학교, 광주농업학교에 유학하였고, 또한 학생운동을 전개했다. 졸업 후 이들은 경향 각지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활동했다. 사립학교 설립 및 교육계몽활동, 수의위친계 조직활동, 3·1운동 주도, 태을교 강비활동, 배달청년회 조직활동, 대한독립단 가입활동, 노농대성회 조직활동, 일심단 조직활동, 살자회 조직활동, 조선민흥회 및 신간회 결성활동 등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민족해방운동노선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의 결합노선에서 출발해 이후 사회주의노선을 수용한 진보적 민족주의노선으로 전개되었으며, 또한 중앙과 지방의 연결, 국내와 국외와의 연계, 좌우협동노선을 종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합적·총체적 민족해방운동노선은 일제로부터 민조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이들이 택한 최선의 길이었다.

이른 나이에 순국한 송내호·송기호 형제,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로 업적 남겨
송내호·기호 형제가 비록 민족해방을 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순국하였지만 이들은 암울했던 1910년대 전남지역 항일조직운동의 시초를 연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였고, 또 1920년대 항일운동의 좌우분화 속에서도 좌우협동노선을 추구했던 민족협동전선론자였다. 이들은 민족의 대동단결에 의한 투쟁으로써 민족해방을 달성하려 했던 맹렬한 실천적 조직운동가로서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완도의 청년투사들은 동양삼국을 무대로 하여 항일투쟁에 매진했다. “당시 전국 13도 218군 중 가장 작은 완도군에서 또 그 중에서도 제일 작은 소안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피검 투옥된 사람들의 연년수가 일제 36년 동안 도합 3백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모두 이들의 영향과 교화를 받았던 결과였던 것이다.

 

저작권자 © 완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