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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중심 사역으로 지역의 변화와 행복 꿈꾼다”

‘평신도 사역’으로 이름난, 완도성광교회 정우겸 목사

  • 박주성 기자 pressmania@naver.com
  • 입력 2017.02.24 12:09
  • 수정 2017.02.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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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광교회 정우겸 목사의 원래 꿈은 시나 소설을 쓰는 문학가였다. 그는 "중도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체험을 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더 행복하게 사는 일에 종사하는 게 의미 있겠다 싶어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인 욥기 8장 7절의 문구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 문구는 미국 개척시대 농민들이 개척에 나서며 신조로 품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문구처럼 아직 창대하지는 않을지라도, 완도성광교회(이하 성광교회)는 82년 10월 10일 창립한 이래 약 35년의 세월동안 지역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첫 예배자들은 41명이었고 현재 등록 신도 3,800명, 평균 출석(예배) 신도 700명이니 성광교회의 변화는 상전벽해, 격세지감이라고 표현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 성광교회의 변화와 발전, 그 중심에는 교회가 창립된 당년도에 11월 30일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정우겸 목사(66)가 있다.

정목사는 어린 시절 오누이들의 등에 업혀 교회생활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때는 신현균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거듭남과 성령불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러다 잘나가는 직장생활 도중 병을 얻고 사선을 넘는 고비를 넘고 목회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장로회신학대에 다니던 중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은 것이 계기가 돼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적극 동참하게 됐다. 이때 재야민주운동을 대표하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광주전남 공동대표와 완도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한때 성광교회의 신도가 늘어나지 않아 정목사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통감하고 사임까지 생각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던 그가 초기 목회 방향을 신도 한사람이라도 질을 높이는 쪽으로 고집해 오다 성장의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도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 2년간 30군데를 돌아다니며 전도 훈련을 받았다. 고민의 끝에서 “전도는 기술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전도는 구원의 감격을 되살려 그 감격을 전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며 자신부터 변화해야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과 ‘구원의 감격을 전달하는 영혼구원 전도’로 소위 80년대 ‘운동권’으로 불린 목회자가 지역교회를 어떻게 성장·발전시켜 왔는지 성광교회 정우겸 목사를 만나 들어봤다.
 

정우겸 목사는 "주체적으로 일반 신도들이 자기 재능을 활용해 신앙생활을 하고 사회를 섬기는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해줘야 한다. 일반 신도를 목사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개념의 동역자로 여기고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평신도 중심의 사역으로 지역의 변화와 행복을 꿈꾸는 그와 성광교회는 한국교회운동의 롤모델로 부상해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목사(목회자)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꿈은 시나 소설을 쓰는 문학가였다. 중도에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체험을 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더 행복하게 사는 일에 종사하는 게 의미 있겠다 싶어서 목회자의 길을 가게 됐다.

성광교회가 평신도 사역으로 전국적으로 명성이 나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권위주의적 영향으로 평신도들의 참여율이 높지 않았다. 교회를 비롯해 어떤 단체든 리더 몇 사람의 능력만으론 움직일 수 없다. 보다 많은 이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게 중요하다.
21세기 한국교회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다. 목회자들이 일반 신도와 동역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 온전한 목회를 이룰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위치한 마을의 속사정을 깊이 알아야 한다.
국민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그런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어둡던 시절에는 목회자들이 신도들을 교육의 대상 이런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목회자이든 일반 교인이든 하나님께서 사명, 재능(교회 용어로 은사 또는 달란트)을 똑같이 주셨다. 또한 교회 안에서 직분만 갖고 일이 없는 실업자가 있어서는 안된다. 노는 교회가 아닌 사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제 핵심 목회 철학은 평신도를 목회 동역자로 세우는 것이다. 심지어 평신도를 목사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 사명과 달란트를 주셨으므로, 그것을 찾도록 도와주고, 그것을 가지고 사역하여 담임목사를 능가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오해도 받고, 문제도 있었다. 10년 정도 서로 간에 의사소통하고, 개방적으로 오픈하면서 하다보니 끈끈한 신뢰관계가 형성이 됐다. 서로 믿고 맡기는 상황이 된 것이다.
목사도 하나의 사역자이고, 상하관계 아니다라고 하니, 이해를 못했다. 오히려 목회자가 중심이 되고, 일반 신도들은 종속적 개념이라는 오랜 전통 관념 때문에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반대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았다. 여기에 평신도들에게 권한을 넘기니 장로님 중에서 “혹시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 아니냐, 젊은 사람 데리고 가는 것 아니냐”하고 걱정반, 우려반이었다. 진솔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지금은 우리 장로님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평신도 중심의 사역들을 진행한 결과 신도들이 교회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심이 강하고 교회 정착률도 높아져 교회성장으로 이어졌다. 당시 다른 대형교회들은 권위주의적 운영으로 문제들이 불거지면서 평신도의 교회운영 참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의 방식에 관심을 갖게 되고,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강조하는 성광교회의 성장이 다른 교회들에게 롤모델이 된 것 같다.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목회 원칙과 철학을 언급했는데 “교회는 1,2년 있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멀리 내다보고 사회봉사를 교회의 한 본질로 이론화하고 실천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고 있다.(웃음) 왜 여기에 이르렀을까. 교회들이 자기 교회 키우는 일에만 능하다. 돈 생기면 기도원 짓고, 수련관 짓고, 버스를 사고... 맨날 자기들 좋은 일만 하고 살고 있다. 이건 아니다. 교회가 자기 배부름에만 신경을 썼지,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교회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생각하게 된다. 일제시대 때 교회가 독립운동에 동참했을 때는 아무도 교회에 돌을 던지지 않았다. 어렵지만,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데 종교가 없고, 종교가 다르더라도 그런 종교를 욕하겠느냐. 시대에 따라 주민들이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섬겨야 한다.
그럼 우리가 다시 국민들 마음 얻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 지역으로 본다면, 군민들의 가려운 데를 긁어줘야 된다. 군청에서 못하는 일, 경찰서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해야 된다. 그래서 복지기관 설립, 바다살리기 캠페인도 하고, 민주화운동도 한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 역할로서 지역주민과 함께 가는 것이고 마음을 얻는 일이다. 지역주민이 도와드리고 행복하게 사는데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 그것을 교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주민들이 생각할 때 저런 교회라면 있어야 된다, 주민들이 필요를 느끼는 교회로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아무 상관없이 무조건 교회 오라는 게 아니고, 주민들이 느끼고 인정하는 교회를 만들어 가자라는 것이다.

소위 ‘운동권 출신 목사’로 유명하더라. 당시 그쪽으로 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
5·18 광주사태가 또다른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정목사는 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지만, 당시 광주사태라고 보통 불렀다고 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예수 좋아하고 한량처럼 살았다.
그때 광주에서 착검한 총으로 발포하는 것도, 학생들을 찌르는 것도 봤다. 그런데 그곳에서 놀라운 모습을 봤다. 황금동에 소위 몸 판다는 여성들은 마지막까지 남아서 치마 입고 나왔는데 속옷 보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보도블럭을 깨서 치마에다 주워 담아 나르면서 시위대가 돌을 던지도록 도와주었다. 반면, 지식인들은 거의 사라지고 숨어 버리는 상황이었다.
그때 느낀 게 저사람들은 몸으로라도 시위에 참여하는데,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어디서 뭐하고 있는가. 그 다음 나는 그동안 좋아하는 것을 즐기고 살았는데, 사람 죽은 이 상황에서 그것들이 무슨 도움이 되나? 바늘귀만큼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쓸데없는 것, 본질이 아닌 것에 빠져 살았구나를 깨닫고 취미를 다 내려놓고 운동권을 접하게 됐다.
결국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이랄까 책임감이랄까 그런게 많이 작용했다. 숨 죽여 살수도 있었지만, 마음의 소리가 그렇게는 안되더라. 그것 때문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했다.

지역사회와 종교는 어떤 관계 설정이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과거에 잘못된 사상이 있었다. 교인이 목사를 위해 있느냐, 목사가 교인을 위해 있느냐. 지금이야 왠만한 사람한테 물어봐도 목사가 교인을 위해 있다고 그럴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느냐,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느냐도 마찬가지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있는게, 그게 정답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단순히 이야기해서 교회는 영혼을 구원해 천국 가게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일단은 천국도 가야 되지만, 현재 이세상에 사는데 급한일 발등의 불이라는게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간관계고, 정신적인 건강이고... 다양한 발등의 불이 있는데 그것들을 교회가 좀 해결하는데 도움을 드리면서 그분들의 삶의 질 향상, 행복도를 높이는 것을 하면서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되고 또 이분들이 아직도 세상은 살만한 가치는 있는 것이다. 그 부분을 도와드리는 역할을 교회가 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전도를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 결론적으로 도출한 ‘감동이 있는 전도’란 무엇인가?
처음 완도성광교회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해 달갑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 사람의 교인이라도 양육을 잘 해서 ‘질을 높이는’ 목회를 고집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면서 양적 성장이 멈추고 급기야 뒷걸음질 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목회에 자신이 없어졌다. 스스로 능력의 한계를 느끼면서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 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려고 생각했다. 목사가 능력이 없으니까 내힘으로 안되니까... 당시는 그런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미국 맥코믹신학대 목회학 박사 공부를 하러 가게 됐다. 거기서 공부하면서 월리교수 박사를 만나게 됐다. 내가 이분 강의 듣다가 목회의 터닝포인트를 경험했다. 나는 질 위주 의 교육을 시키면 교회가 잘될지 알았는데, 그분은 질은 양속에서도 나온다고 그러는 것이다. 평소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내가 생각했을 것인데 마음에 와 닿았다.
전도는 구름 위의 신비한 얘기가 아니다. 삶의 실제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내 방법은 다 구식, 지금은 써먹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전도 기술을 배울려고 30군데 다녔다. 목회를 멍청하게 하고 있으니까 이것을 본 하나님께서 무지하게 답답하셨던 모양이다. “이 멍청한 녀석아, 전도는 기술로 하는게 아니고 구원의 감격이 되살아나면 누구나 전도를 할 수 있어”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제 깨달은 것이다.
나도 옛날에 예수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 감격해서 순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감격은 사리지고 관록만 남아 있었다. “아! 이것은 안되는구나”를 깨달았다. 전도를 안다니고 자신부터 구원의 감동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고, 신도들에게 하는 설교도 십자가, 예수에 대한 것을 연속 시리즈로 하게 됐다. 그러면서 서서히 교인들의 신앙이 되살아났다. 이것이 하나님 체험이고,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충만’이다.
신도들이 체험으로 점점 뜨거워지니 이분들이 전도할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기는 하나님 때문에 기쁨이 생기고, 뜨거워지니까 사람들에게 나가서 자기가 간증해 주면서 “이러니까 예수 믿어야 된다”는 사람이 늘어났다. 폭발적으로 신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7년 동안 120명이었던 교회가 그 다음 보니까 1년 평균 출석수가 50명 이상씩 늘어나는 것이다. 120명, 100명 가지고 7년 하다가 느닷없이 120명, 150명, 200명, 300명 이러는데 정신 없었다. 평균 출석 예배 참가 신도들이 장년이 550명, 아이들 600명까지 올라 갔다. 읍 단위에서는 획기적이고 기적적인 일이다. 한때 성광교회가 출석 신도가 1,100명이 넘고 등록 신도가 3,800명까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예배당 건축하면서 힘들어져서 주춤하다 회복되어 가는 상황이지만, 당시 우리가 기적을 많이 경험했다.

성광교회의 큰예배당 규모에 “건물 짓는 돈으로 봉사활동을 차라리 더 하지”라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다.
그런 소리도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전도하는데 스스로 감동을 찾고, 그것이 신도들한테 전달되고, 그들이 예수를 만나는 그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신도 수가 막 늘어났다. 지금 예배당 전 교회에서 신도들이 전부 수용이 안되니까 주변 건물을 임대해 사용하다가 5예배실까지 늘어났다.
건물 지을 돈이 있으면 선교, 교육, 구제, 지역사회를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장로님들은 지어야 한다는데, 나도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는 게 너무 아까워 짖지 않으려고 7년을 버텼다. “우리가 돈을 거기다 써야 될 때가 아니다”고 버텼다. 그러나 상황은 신도들이 더 늘어나 홀을 더 얻어야 될 판이었다. 주변에서도 “얼마나 묵어 불라고” 얘기가 나올 정도로 건물을 임대하는 것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봤다. 또 예배실 수가 늘어날수록 임대료가 나가야 되는데, 아깝기도 했다. “또 얻어야 되냐?” “그럼, 교회당 지읍시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예배당을 짓게 된 것이다.
예배당을 크게 지었다고 봉사활동 같은 것을 안하는 것도 아니다. 성광교회의 1년 예산이 11억 정도다. 지금도 구제, 지역복지 등에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선교비로 1억 5천 정도가 지출된다. 제외한 것들을 합하면 교회 밖으로 사용하는 돈이 2억이 훨씬 넘는다. 신도들이 헌금 낸 것을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 재정을 100%로 공개하고 있다. 매년 1월 첫주에 세례를 받은 신도들이면 누구나 전년도 결산을 심의하고 새해 예산을 확정해 통과시키는데 참가할 수 있다. 예산 유인물을 나눠주고 100% 공개한다. 교회 개혁이란 게 별개 없다. 예산 100% 공개하고, 모든 일을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면 된다.

예전에 비해 완도 인구는 감소했는데 성광교회 신도들이 증가해 가는 요인은 뭐였나?
우리 교회는 아주 핵심적 가치 2개가 있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한사람, 한사람 모두에게 주신 재능을 찾아 활용하는 목회, 두 번째는 영혼을 사랑하여 이웃에게 전도해서 구원하는 목회다. 간단하게 말하면, 평신도 사역과 전도다.
평신도 사역은 교회 안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평신도 중심 사역을 하는 교회로 자리 잡기까지는 성광교회는 지역의 현황을 잘 파악하고 이를 목회에 적용하는 과정이 있었다. 시대에 따라 주민들이 필요로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서 섬겨야 한다.
일반적인 목회, 전도방법으로는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완도성광교회가 시작한 것이 이웃에게 다가서는 '친 지역주민, 친 지역사회' 활동이다. 친화 프로그램으로 교회가 나서서 주민들의 애경사를 챙겼으며, 풍기 물란한 학생들을 바로 잡아 주는 역할, 불우이웃 돕기, 길거리 청소, 문패달아주기 등을 시작했다. 특히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민의 입장을 우선 생각했다. 예를 들면 불우 이웃을 돕더라도 소리 소문 없이 진행했으며, 외부로 알리기 위한 홍보 활동 조차 피했다. 이러한 결과 주민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 화젯거리가 됐으며, 차츰 주민들이 교회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됐다.
이 작은 시작이 현재 교회가 진행하는 다양한 복지 프로그램으로 발전했다. 위탁시설인 노인전문요양원 운영,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맞벌이 부부 자녀들을 위한 성광지역아동센터 운영, 주 5회 실시하는 독거노인 도시락봉사, 소년·소녀가정에 도시락 배달,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청소년 공부방 운영, 미취학 아동을 위한 성광어린이집 운영, 가정봉사원 파견센터 운영, 성광 자원봉사센터 등이 쉬지 않고 돌아 가고 있다.
이밖에도 세계적인 기독 인재를 양성한다는 목표아래 운영하는 성광아가페독서스쿨은 대안학교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으며, 자원봉사자 과정을 마련해 필요할 때 언제나 동원할 수 있는 1백50명의 봉사자도 확보하고 있다.
교회의 다양한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은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교회가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도록 교회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 놓았다.
평신도 중심의 사역을 진행해 온 결과 첫째는 정착률이 높아졌으며, 둘째 교인들 사이에 교회에 대한 애정이 높아졌고, 세째 구원의 확인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 결과는 곧 교회성장으로 이어졌다.

다문화가정 사역도 진행하고 있다고 들었다. 초반에 어려움도 컸다고 하던데?
다문화가정 사역은 당시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순수하고 순진하게 그 사람들이 남편과도 말이 안통하고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마음이 들어서, 어차피 한국인이 되었는데 적응을 잘하도록 도와주어야겠다는 차원에서 접근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학교도 하고, 예절 교육, 김치 담그기 등 우리 입장에서 그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주자고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이것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보통 시집오는 다문화 국가 여자의 연령은 보통 18,19세에서 21세인데 남자는 40세, 심지어는 50세 이상인 사람도 많아서 연령차가 보통 15-20년 정도가 난다. 나이차가 심각한 문제였다. 나이 차와 성에 대한 무지, 그리고 아내를 돈을 주고 사왔다는 생각(소유물이라는 생각) 때문에 수많은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여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남자들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선의를 가지고 남자들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 사역이 정말 어려웠다.
의료원과 정부 차원에서 가가호호 방문해서 교육하는 서비스가 있는데, 그들과 연계하여 기초적인 성교육, 부부간의 대화법 등을 가르쳐주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리고 외국에서 위장 취업을 해오는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이 한국에 결혼 이주한 자국의 여성들의 전화번호를 이미 입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들이, 부부간에 말이 통하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는 결혼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전화를 하여 유인을 해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생활을 2년 하면 나오는 주민등록증을 받아 도망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 그 여성들의 시부모나 남편이 그 원인을 교회로 돌려 교회가 몇 차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농촌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어진지 오래인데, 다문화가정은 아이들을 적어도 3명 이상은 출산을 하고 있다. 이런 상태로 계속 가다 보면, 순수한 한국인 부부사이에서 출생한 아이들보다 다문화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더 많아지는 상황이 앞으로는 오게 될 것이지만, 현재는 한국아이들이 더 많기 때문에 이 아이들을 왕따 시키고, 한국인 부모들이 학교에 압력을 행사하여 다문화가정의 아이들과 자기 아이들을 분리시키려 한다. 어린이집 운영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있는 어린이집이나 어떤 곳은 초등학교도 한국인 부모들은 아이를 보내려 하지 않는다. 초반보다 더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것들을 보면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

성광교회가 김종식 군수 재임시 어떤 특혜를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있다.
우리가 김종식 군수 때문에 사실은 피해가 훨씬 크다. 덕을 본 것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피해가 크다는 것은 김종식 군수를 비롯한 지역유지들이 전도돼 나오다보니 주민들 사이에서 ‘부자교회’다라는 말이 나왔다. 교회는 그런 이미지가 결코 좋은게 아니다. ‘부자교회’라는 이미지로 타격을 좀 받았다. 또하나는 김종식 군수를 반대하던 분들이 교회가 뭔일을 해도 김종식이가 어떻게 해서 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봤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억울하고, 사실과 너무 딴판인데... 그렇다고 해명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였다.
수탁기관 문제도 그렇다. 군수가 우리 교회 나오기 때문에 성광교회가 수탁하면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청해요양원 수탁 때 월등히 점수가 많이 나왔는데 2시간을 발표를 안하는 것이다.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다. 그래서 항의하고 수탁을 받기도 했다.
또 하나는 우리는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사업부터 우리보다 더 잘하는 곳 있으면 넘기겠다. 수탁 신청할 때 경쟁에 졌던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한다면 이해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안한 사람들이 신청도 안하고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한다.
지금이라도 공개적으로 수탁기관 모집 공고가 나가면 신청해서 경쟁하면 된다. 우리보다 잘하겠따고 인정되면 군하고 얘기해 넘겨줄 수도 있다.
교회가 문제가 있거나 실수 있다면 언제든지 이름 밝히고 않고 성광교회 담임목사 앞으로 그렇게라도 보내 주시면 된다. 이것이 합당하고 옳다고 한다면 언제든지 수용하겠다.

성광교회가 운영하는 몇몇 수탁기관에서 종교적 강요를 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곳 수탁기관들이 현재 종사자 다수가 기독교인이다. 초기 직원을 모집할때 우리 신도들 응모가 많았을 것이다. 지금은 다른 교회 신도들도 증가하는 추세다. 지금 성광교회와 그 비율이 2:1(성광:비성광) 정도로 1/3 이상이다.
교회 신도들이다보니 기독교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들이 인생을 경험한 내용들이 기독교 신앙, 예수 신앙을 가지는 것이 병을 이기고, 노후생활에 도움 되는 것을 자기가 직접 경험하다보니 “내가 해보니 이것입니다”하고 자연히 그 분위기가 기독교적으로 가지 않았을까 싶다. 교회 신도 외 분들이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인정한다.

개인 철학이나 신념이 있나?
“평범은 죽음이다” 우스갯소리일 수도 있지만, 목회하는 방법이나 인생 사는 것도 남이 하는 것은 안하고 싶었다. 평신도 사역도 그래서 그렇다. 목사가 책읽고 하는 그런 것이 잘하는 것이나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을 통해 많이 배운다. 100개국 여행. 거기서 너무 많은 공부했다. 그렇게 산다. 삶에 열중하고 진실하게 살지만 또 한편으로 다른 세계도 경험해 보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성격에 “니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너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있다. 이를 기독교 황금률이라고 한다. 교인이 됐든, 아니든 종교인이든, 일반인이든 간에 조금만 배려하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설령 나랑 반대되더라도, 나도, 저도 모두 주관이 있더라도 어떻게 조화를 이뤄볼까 생각해야 된다. 조금만 배려하고 존중하면 완도 지역사회도 더 좋아질 것이다. 나부터도 얼마나 모질한 사람인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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