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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에세이]詩를 말하다 / 김인석 시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2.10 14:01
  • 수정 2017.02.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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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석 / 시인. 광주 거주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빼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흙에서 자란 내 마음/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하늘에는 석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정지용, 「향수」 전문

고향을 떠난 허다한 사람들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고향에 대한 향수를 가지게 된다. 세월의 두께에 따라, 때로는 행·불행했던 추억의 밀도에 따라,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로 고향을 너무 아프게 잊지 못해 한다.

사람이란 자기 생의 근원에 대해서 한번쯤 뒤돌아보게 되고,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쟁여두었던 추억들을 꺼내어 반추하고 그리워한다. 그래서인지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기도 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다.

정지용 시인 역시 일찍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고향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향수’라는 시에 담았다. 위의 시는 저 바다 건너 이국땅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인 20대 초반에 씌여졌다. 참 따사롭고 포근하고 평화스럽다. “넓은 별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빼기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차마 꿈앤들 잊힐 리야.” 감동이 꿈틀거리는 한편의 그림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김우창 문학평론가는 "한국 현대시사에 가장 기념비적인 서정 시인인 정지용은 '또 하나의 이미지스트, 모더니스트 계열 시인, 감각적 경험을 선명하게 고착시키는 데 있어서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서 옥천 고향의 정서를 보편적 우리 모두의 정서로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을 보편적 우리네 시골 풍경으로 묘사했다. 실개천, 얼룩빼기 황소, 질화로, 짚베게 등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이름들인가. 어릴 적 한번쯤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었던 언어들이다.

정지용 시인은 이러한 구상어를 통해서 감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했다. 특히 “시의 신비는 언어의 신비”라고 했던 그는 언어의 조탁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1년 4행인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을 보면 주로 예사소리인 ㅅ, ㄱ, ㅂ과 울림소리인 ㅇ, ㄹ, ㄴ로 이루어져있다. 예사소리와 울림소리로 이루어진 어휘는 거칠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청각적으로 경쾌하고 맑은 질감을 가지게 한다. 시어 하나하나 선택하는데 있었어도 날밤을 세웠을 그 모습을 그려본다. 시 한 편이 이렇게 마음을 울리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새삼 문학의 힘이 느껴지고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내 고향 남쪽도 바다가 있고 얼룩빼기 황소도 있고 질화로도 있고, 나는 이 시 한 편을 내 피붙이처럼 사랑할 것이다. 참 평화스럽고 따뜻한 그리움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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