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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민족자주 몰락은 현재 진행형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1.26 07:53
  • 수정 2017.01.26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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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선 / 완도 출신. 서울 거주

“서경 전역(戰役)은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ㆍ보수적ㆍ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ㆍ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난을 어찌 1000년래 제1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의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이 바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실패한 데 있다고 하면서, 이 사건이 바로 고대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자주사상이 사대적 유교사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라 했다. 그에 따르면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여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이라 여겼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당시 고려의 상하층에 유포되어 고유 신앙으로 자리했던 풍수도참설에서 비롯되였다. 풍수도참설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고려 왕조의 지배 이념이었던 유교 사상과는 달리 풍수도참설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체질화된 전통 문화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는 보수 지배 계층의 견제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묘청을 비롯한 서경 세력의 주장에도 무리가 없지 않았다. 금국 정벌도 당시의 국제 정세상 가능한 일이 아니었고, 서경 천도의 당위성을 풍수 사상에만 의존했던 것도 문제였다.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고려 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그 반란이 고려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권력구조에서 지방과 개혁, 진보세력의 중심지인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아울러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보수적인 문신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사건 이후 역사적 전개과정을 살펴볼 때 민족자주세력의 몰락이 민족사적 측면에서 가장 큰 영향이었다. 

묘청의 서경천동운동 실패 이후 무신정권때 삼별초의 항쟁이나 공민왕의 개혁정치, 고려말 요동정벌, 조선 초 정도전의 요동정벌 준비 등이 민족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간헐적인 여러 사건으로 볼 수 있으나, 조선시대 내내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가 만연하였고, 자주적인 민족정기는 쇠락해 갔으며, 단재 신채호가 활동한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민족정기가 말살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니 민족사학자인 신채호 선생 눈에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우리 역사영토를 회복하려는 민족의 자주성이 남아있던 사건으로 비춰졌을 것이며, 그렇게 보면 어찌 1천년 내 제1사건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 역사적인 민족자주역량의 몰락은 현재 남북분단시대에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에 의지하는 사대주의를 목도하다보면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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