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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이도재와 '어사암' 이야기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7.01.20 14:09
  • 수정 2017.01.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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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암의 명칭과 관련하여 조선 고종 때의 어사 이도재(李道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1894년(고종 20)에 기장현 독이방(禿伊坊)[지금의 문동리]에 있는 해창(海倉)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漕運船)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였다.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 이 일이 알려지며 주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붙잡혀가서 구금되었다. 관아의 형졸들은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수거해 갔고,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조정에서는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月梅)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곳의 절경과 월매의 교태로 흥이 난 어사는 오언 절구 “하늘이 텅 비었으니 보이는 것이 없고, 사나운 바다는 시객을 위해 춤을 추는데, 저 멀리 돛단배는 언제 무사히 돌아오려나[天空更無物 海闊難爲時 環球九萬里 一葦可航之]”를 짓고 바위에 ‘어사암(御使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때부터 매 바위는 어사암이라 부르게 됐으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주민들은 이도재의 은덕을 기리는 생사단 비를 세웠다. 비석의 크기는 92.5×36×13㎝, 대석은 방부 가로 58㎝, 세로 42㎝이다. 이 이도재 생사단 비는 1972년 도시 개발에 따라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에 있던 것을 동부리 306번지 기장초등학교 옆 송덕비군으로 옮겼다. 해서체로 된 비에는 1883년(고종 20)에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됐었는데, 그때 기장에 와서 여러 가지 폐해를 바로 세우니 이를 영원히 제사한다는 글귀가 명기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주민들은 각자(刻字)가 비바람에 마멸되자 이도재의 은공과 기생 월매의 인정을 기리는 뜻에서 어사암에 이도재라는 이름과 기월매라는 세 글자를 함께 새겼다. 월매는 뒤에 가정부인이 되었고 이도재는 후덕한 인물로 한말 학부대신(學部大臣), 외무대신(外務大臣), 내무대신(內務大臣)을 역임하고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었다고 전한다.

어사암의 명칭은 이도재가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와서 이 바위에 ‘어사암(御使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하여 붙은 이름으로 전한다. 이전에는 바위의 형상이 매를 닮았다 하여 매 바위 또는 응암(鷹巖)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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