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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이사람]한미옥 전남대 평생교육원 강사
한정화 기자 | 승인 2016.12.30 08:50

“바람 나는 이유를 알겠더라”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며 말하는 한미옥 씨(54세). 20여년 전 아이들이 아직 어릴 때였다. 멀쩡한 직장에 다니던 남편이 사고를 쳤다. 결혼 초부터도 돈에 대해서는 애초에 계산할 줄 모르고 가족은 물론 누구에게건 아까운 줄 모르고 베풀기를 좋아하던 남편에 대한 불만이 사그라들지 않던 차에  빚보증으로 덜컥 빚을 떠안게 된 것이다. 남편의 월급 통장은 압류되고 이자가 이자를 낳고 빚은 점점 불어났다. 마이너스 통장은 마이너스에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자식들은 어리고,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살던 아파트를 팔고 친정으로 들어갔다.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고 또 싸웠다. 살 수가 없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에게 불어온 바람이, 그녀가 잡은 잡아야만 했던 바람이 춤바람 신바람이었다.

청해진 열두군고에서 사물을 배우던 미옥 씨는 덜컥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고 합격했다. 2005년 원광대학교 제1회 디지털전통연희학과.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던가. 상이용사로 국가유공자였던 아버지 덕에 대학 등록금이 공짜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사이버 강의를 들으며 실기 교육은 영암 독천 교육장을 오가며 받았다.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에도 3년을 더 다니며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춤을 췄다. 졸업했으니 개인 수강비를 내고 다녀야 했다. 그녀의 사물놀이 스승은 사물놀이패 김덕수의 제자 강행희 선생, 한국무용의 스승은 유봉 한영자 선생이다. 강행희 선생은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3년째 다니던 그녀에게 참말로 독하고 끈질기다고 했다고 한다. 결국 제23회 해남전국국악경연대회 무용 신인부 최우수상을 받았다(아래 사진). 그녀는 지금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사로 사물놀이와 한국무용을 가르치고 있다.

“미쳤지,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그 상황에서 어떻게 매주 세 번씩 기름값에, 강사비 들여가며 그렇게 쫓아다닐 수가 있었겠어요? 우리 가락에 우리 춤에 점점 빠졌어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미쳤으니까 살 수가 있었지, 숨을 쉴 수가 있었지 싶어요…” 다시 생각해도 믿어지지가 않는 시간들. 아득해지는지 잠시 숨을 고르는 미옥 씨. 그 믿기지 않는 시간들이 가능했던 건 절반이 남편의 공이라고 한다. 미웁고 답답하고 싸우기는 했었지만 빚 때문에 쪼들리는 살림을 뻔히 아는 마당에 ‘내가 이래도 되나, 이걸 계속 해도 되나’ 고민이 왜 없었겠는가. 그럴 때마다 남편은 “빚은 내가 알아서 갚을 테니 당신은 하고 싶은 거 하소”, “오늘은 어디로 가는가, 영암? 독천?” 조용조용히 챙겨주고 지원해주는 마음이 한결같았다.

타고난 끼, 한량무의 달인
미옥 씨가 어릴 때 그녀의 아버지는 어린 딸에게 우리 딸내미 텔레비전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장단은 물론 한량무, 신칼대신무, 교방굿거리, 남도굿거리, 북춤, 태평무… 공연들로 무대에 서고 상도 받는 딸. 지난 26일에도 한량무로 문화예술의전당 무대에 올랐다. 그러니까 실상 일찍이 자신의 ‘끼’를 알아본 건 아버지, 그 끼를 살리고 밀어준 건 남편인 셈이다.

미치지는 않더라도 바람은 있어야
미옥 씨는 젊을 때 국악의 매력을 알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 빠지면 점점 더 빠지게 되는 게 국악이라고 한다. 나이들수록 진국이라고, 죽도록까지 해도 좋겠다는 확신이 든다고 한다.

그녀는 일주일 중 이틀은 완도읍에서 장구를, 하루는 신지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친다. 제자들 대부분이 60세 이상이다. 자연스럽게 팔다리가, 허리가 아픈 이들도 있다. 우울증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오는 경우도 있다. 장단을 맞추고 춤을 추다보면 몸에 힘도 생기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흥이 오르면 그 흥이 몸도 마음도 살릴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미옥 씨.
벼랑 끝에서 시작한 일이 취미를 넘어 이제는 평생의 업이 될 줄 몰랐던 그녀가 강조하는 건 '바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마음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크나큰 동력이 될 것이라고.

그녀는 전라북도 남원에서 태어났다. 대개의 가정이 가장의 직업에 따라 거처를 옮기듯 김발 엮는 띠를 납품했던 아버지를 따라 미옥 씨도 먼 제주를 거쳐 완도까지 왔다. 그때가 초등학생이었으니 완도에 이른 지 40여년. “완도가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만도 하다. 지금은 하루하루가 즐겁다는 미옥 씨. 부모님이 살아계셨으면 이 모습 보고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시간이 흘러서 당도해 있는 자리, 지금 있는 곳. 여기까지 오는 동안 겪은 일들은 시간이 흘러서 괜찮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정말 괜찮아지기도 한다. 반면 절대 괜찮아지지가 않기도 한다.
사는 건 어찌보면 시간이라는 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것일 수 있겠다. 물론 그 물살에 휩쓸려버리는지 잘 헤치고 나아가는지에 따라 다다르는 자리가 달라질 테고. 흘러가는 동안 마음의 강바닥에 고스란히 쌓이는 침전물들은 아팠던 것이건 기뻤던 것이건 그 두께를 더해가며 강이 되고, 강을 이루는 풍경이 될 것이다.

한정화 기자  wando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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