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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 빼고는 다 해본 깔끔한(?) 사나이

세상을 만드는 손

  • 한정화 기자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12.23 12:54
  • 수정 2016.12.2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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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일까. 그는 부모 없는 슬픔이라고 한다. 오십에 가까운 나이니 조금 일찍 부모를 여의었나 싶지만 조금 일찍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의 나이 세 살, 어머니는 열다섯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다섯 살 위인 막내 누나의 보살핌으로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바로 상경했다는 김현윤 씨(사진). 그때부터 도둑질 빼고는 다 했다. 봉제공장이며 어디며 가리지 않고 일했다. 고등학교 대신 야학에 다녔다. 얼굴은 물론 '아버지'라고 불러본 기억도 안 나는 아버지, 그리고 그리운 엄마. “어린 마음에 술 담배 안 하면 엄마 아부지한테 부끄럽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 담배는 아예 안 했다”는 현윤 씨.

악착같이 버티던 서울살이 17년만인 서른네 살에 짝을 만났다. 같은 완도 출신이라 서로 잘 이해하고 편하겠다 싶었다. 알고 보니 신부의 언니랑 신랑의 여동생이 친구였다는 인연. “여자 일 남자 일 따로 없어. 각시가 설거지하면 나는 청소” 그의 지론이다. 살림도 곧잘 한다. 결혼 전 그의 집에 갔을 때 싱크대가 빤짝빤짝한 걸 보고 맘에 쏙 들었다는 아내의 고백은 나중에 들었다.

둘째 아들을 낳고 얼마 안 돼 현운 씨네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완도에 와서도 톳일이며 농사며 막노동이며 도둑질 빼고는 다 했다. 귀향한 지 어느덧 10년. 지금은 환경미화원으로 자리잡았다. 조금 늦더라도 두 번 손이 안 가게 처리하는 깔끔한 성격으로 결국 이 일을 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는 그는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게 최고라고 했다. 자식들에게도 공부만 하란 소리는 안 한다. 뭐든 최선을 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씻어낼 수 없는 큰 슬픔은 여전히 슬픔인 채로 맺혀 있지만, 현윤씨는 지금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고 가끔 좋아하는 족구 경기를 하는 재미, 부모와 살던 신지의 빈집에 아내와 아들들 데리고 가 김밥과 라면을 먹고 오는 재미가 있으니 그럼 됐다고 한다. 괜찮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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