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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란화보다 더 매운 향기 '만해 한용운' 아내의 출산일에 출가한 만해

[문학의 향기]

  • 김형진 기자 94332564@hanmail.net
  • 입력 2016.12.16 09:50
  • 수정 2016.12.1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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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사랑' 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밋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어두운 면을 반사하는 가을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합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은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사랑의 존재>를 노래한 만해의 시(詩). 불교적 수행자의 입장에서 보면 스님이 어떻게 저런 사랑과 관련한 글을 쓸 수 있을까하겠지만, 세상의 시 중, 저 처럼 사랑의 존재성에 대해 절묘하게 표현해 낸 글도 없을 듯하다.
스님이 어떻게 저게 가능했을까?
시(詩)란 말씀 언(言)변에 절 사(寺)가 더해진 한자어.
본래는 절의 말이란 뜻. 그 옛날 생각의 깨달음에 이른 대승고덕들이 했던 말, 그게 시였던 것인데. 이는 바꿔 말해 깨달음을 얻어 진리를 말하는 자가 곧 시인이었던 것이다.
생각을 통해 깊은 자각 속에서 마음의 깨달음에 이른 이, 그리해 인류가 끝날 때까지 불변하는 진리의 표징이 된 위대한 예수와 부처, 공자의 말은 곧 시(詩)였고 그래서 그들은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어떻게 아내의 출산날에 가출을 할 수 있을까? 불가에서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모여사는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운우지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전생의 못다한 깊고 깊은 인연이 남아있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는가?
만해의 그날 가출은 그것으로 출가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만해는 무엇 때문에 출가를 결심했을까?
일단은 시대적 배경의 혼란스러움이었을 것이다.
조선왕조 오백 년의 유구한 전통을 무너뜨린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경장(1894)과 을미왜변(1895)에 맞서이렇게 시골에 묻혀 있을 때가 아니구나!하고 ‘불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구하고자하는 는 청년의 결기는 시대정신에 몹시도 괴로웠을 것이라는 것.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함께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가지게 되고. 그 의문을 풀어보고자 고향을 떠나 방랑의 길에 오르게 되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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