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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

배민서(호스피스 간호사)

  • 배민서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8.19 14:01
  • 수정 2016.08.19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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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기나긴 여름방학이 끝나가는 지난 주말에는 갈베스톤 바닷가를 다녀왔다.

아들은 이번 여름방학 동안 자신의 힘으로 집을 구하고, 인턴사원으로 일을 하여 2천5백불을 모았다고 했다. 녀석은 차를 사 준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다.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중고 자전거를 사서 패달과 안장을 정비하여 업그레이드 시켰다며 자랑하듯 나에게 보여주었다.

미국에서는 아이들이 18세가 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부모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처럼 아들은 훌쩍 독립된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조금 비싼 씨 푸드 레스토랑에 갔더니 "엄마 아빠가 사 줄 거지?" 하며 걱정스레 묻는다. "에유~ 울 아들 돈도 많이 벌었는디... 사 줄래~" 하며 키득키득 우리는 함께 웃었다. 아들은 자신이 번 돈으로 세이빙 어카운트를 만들고 알뜰하게 재정을 관리해가는 모습이 대견하기만 했다.
우리는 함께 푸짐하게 수시, 사시미, 대게 등을 먹고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바닷가를 찾아갔다.

텍사스의 남쪽에 위치한 바다는 960킬로미터나 되는 해안선이 펼쳐져 있는 광활함과 따뜻한 멕시코만의 바닷물이 만나는 독특한 곳이다.
미국의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과 섬 하나 보이지않는 검푸른 바다는, 완도의 보드랍고 아기자기한 바다와는 완전 다르지만 나에게는 늘 정겨운 고향같은 느낌을 가져다 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을까?
나는 매년 여름이면 본남개미 작은 모래 밭으로 친구들과 물놀이를 다녔었다.
내 얼굴은 벌겋게 타서 콧 잔등부터 껍질이 벗겨졌었고 매일같이 바닷가엘 다니다 보면 물이 나고 드는 물 때를 느낄 수가 있었다. 
바닷물이 빠지고 작은 모래사장이 몇 곱으로 넓어지면서 물장난하던 우리들의 발 밑에는 꼬물꼬물 작은 생명들이 간지럽히기를 시작한다.
바닷물을 안 먹으려고 최대한 목과 입을 내밀고 팔을 길게 뻗어 한 줌 쥐어 꺼내보면 무지개 빛깔의 모래고동들이 햇살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이런 날에는 고동 잡는 재미에 폭 빠져 파도에 휩쓰려 바닷물을 실컷 들이 마시곤 했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잡은 고동들을 품에 안고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왔었다.
그 날 밤에는 고동삶는 냄새가 이집 저집에서 향긋하게 피어오르고 토방에 걸터 앉아 옷핀으로 고동을 까먹던 오븟한 행복이 있었다.
고동을 까서 참기름, 간장, 깨, 고추가루, 파, 마늘을 다져 조물조물 무치면 탄생되던 고동반찬... 아! 막 지은 따근한 밥에 비벼먹던 고소한 맛은 내가 지금도 그리워하는 바로 고향의 맛이다.
또한 이쁜 고동껍질은 여름방학 과제물로 꽃병도 만들고, 장식품들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갈베스톤의 길다란 해안선을 따라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이내 바람과 파도가 밀려와 우리의 지나온 자국들을 지워 버리겠지만, 오랜만에 아들의 손을 잡고 끈적하지만 짭조름한 바다내음을 맡으며 함께 또 한 장의 추억을 만들고 있었다.

내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치열하게도 달려왔었다.
발 밑에 깔린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나의 추억들은 인생의 밀물과 썰물에 씻겨 더 고운 모래로 부서지고 하얗게 반짝이고 있었다.
때로는 바위끝에 하얀 눈물을 흩뿌리는 파도의 절규가 심연의 끝 어딘가에서 소용돌이로 남아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인생은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좌절이 있고 슬픔이 있기에, 그 너머에 만져지는 나의 평범한 일상이 어쩌면 더 감미롭고 소중한지도 모른다고 ......

혼자 중얼거리며 신현림 시인의 [자화상]을 떠 올려 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닦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