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설날에 생각하는 토정 이지함 선생

마광남(장보고연구회 전 이사장)

  • 마광남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2.05 23:24
  • 수정 2016.02.05 23:29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꼭 이맘때가 되면 누구누구 할 것 없이 토정비결을 보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 있었다. 한 해의 운세를 보고 좋은 일 궂은 일을 가려서 조심하며 살아왔다. 토정비결이라는 것이 꼭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 달에는 물을 조심하라는 등의 말에 그때가 되면 그 말을 떠올려 조심하게 된다. 그래서 매년 정초에 토정비결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 이 토정비결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토정 이지함이다. 이지함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조선 명문 가문의 사람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이지함은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는데 그의 형 이지번의 권고를 받고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을 새워 날이 밝도록 공부하곤 했다. 그 결과 경전을 모두 통달하고 온갖 사서(史書)와 제자백가의 책까지도 섭렵하였다.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되면 평소에 익혀온 것처럼 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응시하려고까지 하였는데 마침 이웃에 신은(新恩)을 받고 연희를 베푼 자가 있었다. 그것을 본 그는 마음속으로 천하게 여기고 과거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지함의 자는 형중(馨仲)인데 그는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모산수 정랑(毛山守呈琅)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초례를 지낸 다음 날 밖에 나갔다가 늦게야 들어왔다. 집 사람들이 그가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를 지나다가 얼어서 죽게 된 거지 아이들을 만나 도포를 세 폭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었다고 하였다. 지함이 “아내의 가문에 길할 기운이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장차 화가 미칠 것입니다” 말하고는 가솔을 이끌고 떠났는데, 그 다음 날 모산수 집에 화가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 그들의 현부와 길흉을 이따금 먼저 알아 맞추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무슨 수로 그렇게 아는지 아무도 몰랐다.젊은 시절에 여러 주군(州郡)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서 온갖 수단을 다하여 시험해 보았지만 그는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로 색욕을 끊었다.

토정은 중종 28년(1533) 출생해 57세 되던 1573년 포천 현감을 제수 받았다. 이것이 생애 첫 관직이었다. 선생이 포천 현감에 임명되었을 때 베옷과 짚신, 포립 차림으로 관청에 출근하였다고 한다. 관아의 아전이 음식상을 올리자 선생은 한참을 살피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고 먹을 게 없다고 하자 아전이 뜰에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졌다고 빌면서 다시 성찬을 차려 왔으나 끝내 물리치고 아전에게 잡곡밥 한 그릇과 우거지국 한 그릇만을 삿갓 상자에 담아 올리라고 명하였다. 선조 11년(1578년) 아산 현감을 마지막으로 이지함이 생을 마감하였다.

토정은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대신 전국을 유람했다. 서해의 섬을 돌며 백성들이 먹고살 길을 찾는가 하면 조각배를 타고 제주를 다녀오며 바다 무역을 통해 빈곤 퇴치를 모색했다고 전한다. 삿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저잣거리를 활보하고, 열흘을 굶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해 사람들로부터 기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는 토정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지함의 저서로 ‘제봉집’(霽峯集)이란 책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