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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완도군 설군의 의미

  • 완도신문 wandonews@naver.com
  • 입력 2016.01.19 23:43
  • 수정 2016.01.2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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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이 설군 120주년을 맞는 2016년을 특별한 해로 정하고 홍보에 주력하겠다고 한다. 완도군 관계자는 오는 2월 3일 설군 120년 맞는 날을 기념해야 하지만 5월 장보고수산물축제와 군민의 날 등 행사 때문에 따로 준비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신 군에서 개최하는 모든 행사 앞에 ‘완도 설군 120주년’을 붙여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는 방침이다.

완도군은 고종 33년(1896) 4월 완도읍 군내리에 군청을 설치하고 초대군수 이규승이 부임했고, 이어 5월 객사(청해관)에서 첫 군민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완도군지’ 927쪽).

설군의 주역은 심재 이도재 공이다. 이 공은 오위도총부 호군직에 있다가 1886년 고금도로 유배 왔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해배돼 그해 전라감사로 전주에 다시 부임했다. 이듬해인 을미년(1895) 봄 고금도에 내려와 각 도서 대표들을 덕동으로 불러 군의 이름과 군청 위치 등에 관해 자문을 받았고, 군부대신과 학부대신을 역임하며 병신년(1896)에 영암, 강진, 해남, 장흥에 속한 유인도와 무인도 등을 통합해 완도군을 설군했다.

그런데 설군의 주역인 이도재 공에 대해 우리는 아무 관심이 없다. 군청 홈페이지에서 '이도재‘를 검색하면 단 1개의 페이지가 나오는데 사실 그것조차 이 공과는 무관한 것이다.

완도군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고금면 일덕암리 소재 ‘이도재 적거지’의 관리 상태는 심각할 정도로 부실하다. 지난해 가을 초가 지붕을 새로 해 깨끗해 보이지만, 보수업체 관계자로부터 당시에 확인한 바로는 지붕 서까래가 전체적으로 썪었을 뿐만 아니라 처마 부분에서 마루로 흙이 떨어지고 썩은 물이 벽으로 흘러내려 지저분했다.

적거지라지만 마당 한 쪽에 설치된 표지판 설명이 없다면 이곳에서 공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곳이 진짜 유배지였는지 의심하는 이들조차 있다. 장소도 다를 뿐만 아니라 현 초가집은 이 공이 살았던 집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도재 공 또한 역사적으로 공과(功過)가 있다. 전라감사로 있을 때 동학의 지도부 김개남 장군을 체포해 전주에서 참수했던 인물이지만, 어쨌거나 완도군 설군 관련한 주역으로 기념하려면 거기에는 설군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 그리고 최소한 이 공의 초상이라도 전시했어야 맞다. 여기에 문화관광해설가를 배치하고 방문자가 쉬어갈 공간 마련과 마당에 깔린 공사판 사석 대신 잔디마당이라도 두면 금상첨화겠다. 군청 홈페이지에 '설군 주역 이도재 공 기념' 특별코너를 마련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설군 주역과 유적을 대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데 120년 전 설군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누가 알 것이며, 장차 120년 뒤 완도 미래를 누가 전망이라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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