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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바다는 금바다”

완도 미역·광어 양식업의 선구자 이정시(74) 대표

  • 김영란 기자 gjinews0526@hanmail.net
  • 입력 2015.12.17 15:28
  • 수정 2015.12.2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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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일이나 사상에서 다른 사람들 보다 앞선 사람을 칭할 때 선구자라 한다. 신지면 동고리 소재 정일수산 이정시 대표를 두고 미역과 광어양식의 선구자라 하면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이 대표는 그렇게 완도의 양식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60년대 후반 완도의 자연산 건미역 20장 1손은 6000원을 호가할 정도의 고가로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이 당시 공무원의 한 달 급여는 2~3만원이었다고 하니 일반 서민들dl 자연산 미역을 먹 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겠다 싶다. 하지만 전량 자연산 이었기에 일본의 수요에 물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쯤 여수와 충무에선 미역양식 기술개발이 한창이었으며 이 대표 역시 이곳들을 찾아 양식 기술을 배워와 신지면 동고리 남쪽 바다에 미역 양식을 시작했다.  당시 소안도 일부와 신지면동고리 8어가가 미역 양식을 오나도에서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3년이 지난  71년도 부터 미역 생산략이 늘어나자 완도의 미역가공공장이 늘기 시작했다. 인력과 시간이 투자되는 건미역이 아닌 염장미역과 염장미역줄거리가 상품화 돼 이것 또한 전량 일본으로 수출됐다.

이 후 20년 동안 미역가공공장이 200여개로 늘어났으며 완도의 아줌마들을 보려면 미역공장을 찾아야만 했던 때이다. 이 시절 ‘완도는 개도은 10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왔다고 하니 당시 완도경제 상황이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후 90년대에 들어서 미역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미역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미역산업이 하향세에 접어들고 영세 업자들은 하나 둘 공장을 처분하기 시작한 때였다.

이 대표는 이 때 광어 육상 양식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제주와 여수, 충무 등을 다니며 광어 육상양식에 필요한 기술력과 인력을 투자 해 육상 양식을 또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1~2년을 키워 상품화 된 광어가 국내에선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았다. 판로를 고민하던 그는 미역가공공장 운영 당시 친분을 이어 왔던 일본 친구들을 통해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기 시작 했다. 완도 광어의 첫 해외수출의 물꼬가 터진 것이다.

이후 안정적인 판로가 구축이 되었고 또 다시 광어 등 어종 양식어가들이 늘어났지만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항상 생각을 열고 있어야 한다.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대비 해야한다”며 “요즘 젊은이들은 자기가 가는 길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는 길에 열과 성을 다 하면 그곳에서 결과가 보인다”며 그만의 소신을 전했다.

또한 “완도의 바다는 금바다다. 이제는 일본 수출이 아닌 중국 상류층 3억의 인구를 겨냥해야한다. 중국의 상류층 식탁이 육류에서 해조류로 바뀌는 추세다. 중국인 입맛에 맞는 상품개발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금바다 활용은 우리의 숙제다. 하지만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면 양식업을 할 수 없게 된 현실이 안타깝다”며 젊은 사람들이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완도가 돼 젊은이들이 완도를 떠나지 않고 금바다를 지켜 나갈 수 있길 희망했다. /김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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