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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살아온 세상, 참으로 넓고 크다

완도를 희망하는 사람들: 박공예가 김하용 씨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5.08.19 12:00
  • 수정 2016.06.1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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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공예가 김하용 씨가 그의 작업실에서 인두를 이용해 박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집 마당은 그리 넓지 않은 텃밭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채 지붕으로 올라가는 덩굴 중간에 아이 머리만 한 연초록 박이 달렸다. 작은 별채 옆에서 지붕 위로, 종려나무 줄기를 타고 박 덩굴이 하늘로 오른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바가지탈 하나가 반긴다. 거실을 빙 둘러 온통 박공예 작품이 주렁주렁 걸렸다. 장식장 위나 벽에 걸린 각각의 박 안에 모두 뭔가 담겨 있다. 손잡이가 달린 뚜껑을 열자 여러 씨앗이 들었다. 다 쓰임새가 있다. 제법 큰 박 표면에 ‘쌀되박 보관통’ ‘1872년 동지중추부사이신 김동식 한정숙 고조할아버지가 쓰시던 쌀되박’이라 적혔다. 그 안에서 삼베를 입힌 어른 손보다 약간 큰 바가지를 꺼냈다. 그의 고조부모가 쓰던 쌀되박이니 대략 150년이 넘었다. 그는 그 되박을 신주 모시듯 귀하게 보관해 왔다.

박공예가 김하용(66) 씨의 이력은 참 다양하다. 우선 농업인이다. 1974년 입사해 지난 2006년 퇴사하기까지 33년 중에서 28년간 농협에서 지도 업무를 봤다. 농업 기술은 물론 생활 지도와 문화 강좌를 도맡아 왔다.

김 씨의 완도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넓고도 깊다. 농협 퇴사 후부터 2013년까지 완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완도 전 지역을 답사하며 설화, 민요 등을 정리해 왔다. 특히 당제나 갯제와 관련한 이야기는 천일야화를 써도 부족할 정도다. 요즘은 완도말(토착어)에 공을 들이고 있다.

농업인, 향토문화연구가에 이어 그의 인생에서 상황봉을 뺄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요즘도 매달 10회 정도 산에 오른다. 지난해 등산만 126회에 이른다. 그중 3분의 2가 상황봉이다. 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가꾸고 보호한다. 그래서 상황봉 지킴이를 자처한다 또 그는 체육인이다. 태권도 공인 6단이다. 매일 새벽 공설운동장 체육관에 들러 주민들을 지도하고 또 함께 운동하며 건강의 섬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김 씨는 2008년 정부가 선정한 박공예 분야 신지식인이다. 여러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인터뷰를 한 뒤 제법 유명세를 탔다. 나주, 수원, 완도 등에서 20여 차례 국제전과 개인전을 가졌다. 완도군립도서관에서 3년 정도 박공예 강좌를 열기도 했다. 지금까지 40년 넘게 박공예의 길을 고집스레 걸어 왔다.

그런데 왜 하필 박이었을까. 어렸을 적 김 씨의 모친이 조리한 박나물이 그렇게 맛났다고 한다. 박나물 하고 남은 껍질은 바가지를 만들었다. 박과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박공예를 하게 된 사연이 재밌다. 군대 전역 후 전봇대에 걸린 구멍 숭숭 뚫린 박을 손질하고 채색했더니 이를 본 사람들이 작품이라며 다 칭찬하더란다. 그렇게 그의 1호 작품이 탄생했다.. 2호 작품도 우연히 나왔다. 텃밭 어린 박에 유치원생 아들이 꼬챙이로 낸 상처를 살려 작품으로 만들었다.

▲ 김하용 씨의 고조부모가 사용했다는 150년 된 쌀되박이다.

최근 장보고기념관 측이 전시를 목적으로 장보고 대사와 이순신 장군을 그려달라고 주문했을 때 만들었던 작품이 현재 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달마 대사를 많이 그려 해남 대흥사 도솔암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그린 달마는 배불뚝이 달마가 아니라 근육맨이다. 죽은 과거의 달마 대신에 희망을 주는 부처로 그리고 싶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 외에도 부처와 성모 마리아가 나온다. ‘실연’이란 작품에는 실의에 빠져 길게 목을 빼 늘어뜨린 젊은이도 등장한다. 가시관을 쓰고 수난 당하는 십자가 예수의 배경에 무수한 빛줄기가 퍼지는데 이마에는 붉은 피가 선명하다. 김 씨 자신의 피라고 했다.

현관 입구에 걸어둔 바가지탈이 매일 김 씨에게 욕을 하더란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자신의 짝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인 것 같아 만들어 줬더니 그 후로 잠잠하더라는 얘기도 재밌다. 김 씨는 고대로부터 써오던 아악기를 박으로 재현하기도 했다. 신지 명사장 솔밭에 떨어진 솔콩(솔방울)을 박에 붙여 만든 작품들에서 감탄이 절로 난다.

그래도 유독 눈길이 가는 작품은 말 그림이다. 말띠인 부인의 생일 때 말 셋을 새겨 선물했다. 그 옆에 말 여렷이 나오는 작품이 또 있다. 가족이 늘어 전부 여섯이 된 거다. 가장 작게 그린 말 둘이 김 씨 부부다.

김 씨는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다. 장사꾼이 아닌 박공예가로 남기 위해서라고 했다.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다. 그 길을 스스로 개척했고 연장도 만들어 이름을 붙였다. 그랬더니 뒷 사람들이 따라 그 길을 걸었고 그가 이름 붙인 연장을 만들어 썼다.

김하용 씨는 농업인으로, 향토문화연구가로, 자연인으로, 체육인으로 그리고 박공예가로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왔다. 그가 완도 사람인 것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오늘도 그의 부인은 미역공장에 일하러 가고 그도 역시 세상으로 나간다. 그의 호는 홍태(洪太)다. 크고 넓게 살라는 뜻이다. 그가 살아온 세상이 참으로 넓다. /박남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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