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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주미란(결혼이민자, 중국명 주미라 周美蘭 )

  • 김영란 기자 gjinews0526@hanmail.net
  • 입력 2015.08.19 11:58
  • 수정 2015.11.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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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미란(결혼이민자, 중국명 주미라 周美蘭 )

2010년 7월 11일 난 한국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홍분보다 마음은 긴장됐다.

한국말을 모르는 난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남편 가족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데 신랑이 중국에 있을 때 다정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자신이 좀 생겼다.

입국신고서와 여권을 검사관에게 내밀었다. 검사관은 여권과 내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입국관과 하는 말은 많이 연습했지만 검사관이 하는 말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통관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졌고 검사관과 대화가 이어질 수 없어 마지막으로 내 남편과 통화를 한 후 날 통과시켜 주었다.

나중에 신랑을 통해 알아보니 내가 머리를 파마를 해버려 여권에 있던 모습과 안 닮아 그렇게 됐다고 알려줬다. 한국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한국에 온 다음 날 아침 일이다. 한 밤중에 달려내려와 많이 피곤했지만 거실에 주무시는 시어머님의 신음소리를 들으니 자꾸 신경이 쓰였다.  시어머님이 많이 아프시나 궁금했지만 말로 표현할 줄 몰라 당황스러웠다. 아침이 되자 뭘 해서 먹을까, 어머님이 아프신 것 같은데..., 걱정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으나 냉장고에는 김치, 풋고추, 계란뿐이었다. 계란은 후라이를 하고 풋고추는 볶았으나, 김치는 중국에서 안 먹어 봐서 그대로 상에 올렸다.

어머님은 “이것이 뭐냐? 이것을 어떻게 먹을 수 있냐?” 못 먹겟다고 하셨다. 중국에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밥을 해주면 잘했든 못했든 어머님이 기뻐하시며 칭찬해 주셨다. 칭찬은 못할망정 인상을 쓰시니 눈물이 줄줄줄 흘러 내렸다.  신랑은 달래주었다. “괜찮아 약이 아니면 다 먹을 수 있단다”라고 말해줬고 마음이 좀 풀렸다.

이 사건으로 시집살이의 첫 맛을 보았다. 한·중 식문화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진정한 한국 며느리, 한국 마누라, 한국 엄마가 되려면 음식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신랑을 따라 공장 식당에서 일하게 됐다. 주방 일을 하면서 식당 주방장의 심부름을 잘 해서 주방장이 엄마처럼 음식부터 모든 걸 알려 주었다. 요리책과 전자 사전을 손에 항상 들고 다녔다. 모든 한글이 나타나면 바로 사전을 찾았다. 주방장과 장을 볼 때도 길 양쪽에 있는 글을 물어보고 사전에서 바로바로 찾았다. 이젠 한국 김치도 맛있게 담글 수 있게 됐다.

2011년 5월 한국 법무부에서 진행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다 이수하고 시험을 보고 통과했다. 이 프로그램은 결혼 이민자에게 꼭 필요한 이수 과정이다. 이것을 이수해야 한국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고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있어 국적을 취득하든, 영주권을 취득하든 더 빨리 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2013년 2월 국적취득을 신청하고 6개월이 지나서 국적을 취득했다.

2011년 7월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난 후 난 한 동안 우울했다. 아이가 있으니 공부를 하러 다닐 수 없었고, 한국어도 더 배워야 되는데 신랑은 김 공장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집에 올 시간이 거의 없어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해 자신감이 없어진 상태였다. 

신랑의 생일이었다. 중국에서는 생일 때 빨간색 속옷을 선물해주며 행운과 건강을 빈다. 그래서 신랑이 기계 관련 일을 하다 보니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빨간색 속옷을 선물했다. 하지만 반응은 아니었다. “어떻게 남자가 빨간색 속옷을 입느냐 돈을 쓸 데가 없느냐”고 원망했다. 지금 생각하면 양국 문화의 차이였다. 신랑이 중국 풍속에 대해 좀 더 알았다면 내 깊은 뜻에 감사했을 것이고, 내가 한국 풍속을 더 알았다면 신랑한테 더 마음에 드는 선물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던 중 아이가 4개월 때 다문화센터의 방문서비스를 받았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 다행히 우울증에서 빠져나왔다. 오전에 아이를 업고 다문화센터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오후에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다니면서 정신없이 살았다. 

나는 2013년 6월에 완도에 정착하고 3월 완도군 다문화지원센터 통번역 지원사로 일하게 됐다.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 있게 열심히 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완도는 저 같은 결혼이민자의 수가 적지 않다. 우리가 한국에 오는 목적을 달리 생각하지 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만 생각한다면 한국어도 어렵지 않고 고부 갈등도 아무 것도 아니다.  고부 갈등이 있으면 진심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사회문화 차이가 있는 것은 우리들이 더 배우면 된다. 얼마든지 우리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지역사회 사람들도 우리들을 차별의 눈으로 보지 않고 우리를 온전히 같은 지역주민으로 받아주면 좋겠다. 사람이 차별된 것이 아니고 문화의 차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결혼 이민자들도 우리지역 완도에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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