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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항 물양장에서 생선 말리는 노부부

완도를 희망하는 사람들: 김재열·김생님 씨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5.06.18 14:43
  • 수정 2015.11.04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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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생님 씨가 완도 오일장 어물전에서 갑오징어를 손질하고 있다.


완도항 모습도 나날이 변해간다. 바다가 땅으로 변하고 거기에 높은 빌딩들이 경쟁하듯 올라간다. 새로운 대형 랜드마크의 등장으로 항구는 늘 상전벽해다. 수협 활어공판장 한 켠에 둥지를 틀고 생선을 손질해 말려 파는 노부부가 있다. 오래 된 정물처럼 10년 넘도록 한자리에서 완도항의 익숙한 일부가 됐다. 비오는 날만 쉰다.

김재열(74) 씨와 부인 김생님(72) 씨다. 작은 목욕탕 의자와 칼과 도마 그리고 리어카 한 대가 그들의 생산수단이다. 바로 옆 수협 활어공판장에서 싸고 신선한 선어를 구입해 손질하고 말려서 판다. 생선 비늘을 벗기고 지느러미를 자르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는다. 그리고 건조대에 말린다.

김재열 씨의 생선 다루는 솜씨도 제법이다. 그래서 부인은 밖으로 돈다. 마른 생선을 리어카에 싣고 배달하거나 식당 등지로 팔러 나간다. 주문 받아 손질한 생선을 택배로 부치기도 한다. 그래도 장어나 갈치 같은 생선은 부인이 직접 해야 한다. 손질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즘은 갑오징어와 쏨팽이가 많이 난다고 했다. 건조대에 어른 손바닥만 한 쏨팽이가 작품처럼 널려있다. 맑은 해풍과 햇볕에 말라간다. 참 깨끗하다. 그러나 요즘 수협유통센터 신축 관계로 손님이 뚝 끊겼다.

장날 되면 부인 김생님 씨는 장터 어물전에 좌판을 깐다. 자릿세, 단속, 텃새 등으로 갈수록 자리는 좁아진다. 결혼 후 아이 낳고 업어 키우면서부터 해온 일이다. 멀리 강진 마량장, 보성장 등 안 가본 곳이 없다.

두 부부의 고향은 약산(조약도) 득암리다. 1942년에 태어난 김재열 씨를 데리고 아버지 김정길(99) 씨는 는 일제의 수탈을 피해 중국 길림성으로 가 농사를 지었다. 해방 후 귀국한 가족은 완도에 자리잡고 부친의 어선 사업이 성공해 큰 부를 쌓았다. 김재열 씨는 군대 제대 후에 연승어업, 미역 판매, 활어 중매인, 선박 인허가 등 여러 일을 해왔다. 드라마처럼 흥망성쇠를 겪었다. 생선 손질하는 일은 2002년 이후 지금까지 해왔다.

 

처음으로 김생님 씨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동시에 막힌 가슴으로 손이 갔다. 두 아들이 부모인 자신들보다 먼저 세상을 떴는데, 남은 손주들을 키우는 일이 고스란히 그들 몫이 됐다. 힘들어도 쉴 수 없고 아파도 누울 수 없다 이유였다. 올해 99세로 아직 건강한 부친을 모시고 산다.

김생님 씨가 손질하던 갑오징어를 보이며 뼈 있는 농담을 한다. “이래뵈도 이놈들은 배도 있고 밧줄도 있고 또 자기 보호할 먹물도 있단 말이시.” 내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겐 벌어논 재산(배)도 없고 연줄(밧줄)도, 내세울 학벌(먹물)도 없다.”

이들과 절친한 음식특화거리 한 식당 대표는 “그 어려운 고비, 아픈 상처 다 이기고 다행히 잘 살아 고맙다”고 말했다.

강진 마량 수산시장은 할머니 좌판을 양성화하고 지원하는데 완도에서 계속 늘어나는 대형 회센터의 진입장벽은 갈수록 높아만 간다. 수협산지유통거점센터(FPC)가 새롭게 준공되면 이들 부부의 처지가 어떤 변화를 겪을지 알 수 없다. 최신식 현대화 바람에도 오래된 미래로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박남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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