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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완도 청년들 열정 넘쳤다”

완도를 희망하는 사람들: 5·18기념재단 김양래 상임이사

  • 박남수 기자 wandopia@daum.net
  • 입력 2015.05.21 02:57
  • 수정 2015.11.20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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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로 취임한 김양래 씨를 지난 5월 19일 오후 2시 재단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양래 상임이사는 취임 후 5·18문학상, 5·18인권상, 35주년 기념식 등 굵직한 행사를 주관하느라 피곤한 표정이었다. 더구나 재단 비정규직 직원 해임과 관련한 여론과 기념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보훈처)와의 마찰로 심기가 불편했을 텐데 시종 밝게 인터뷰에 응했다.

완도읍 대신리가 김양래(59) 상임이사의 고향이다. 그의 외가는 완도읍 가용리로 초등학교 교사인 부친을 따라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 나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쳤고 이후 광주에서 성장했다.

1956년생인 김 상임이사는 전남대 임학과(75학번) 3학년을 마치고 1978년 군에 입대해 15개월만인 1979년 9월 의가사 제대해 이듬해 봄 4학년으로 복학했다. 1980년 봄 당시 학교는 학원민주화 문제로 시끄러웠다. 농대 서클인 ‘한농’ 멤버로 활동했다. 복학 후 풍물패를 복원하며 총학생회(당시 회장은 박관현) 기획위원회에 참여했다. 풍물패를 주도하며 학내 시위 기획을 담당했다. 5월 14일과 15일, 전남대를 에워싼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가두로 진출해 도청 앞에 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농악대가 늘 앞장섰다. 16일에도 도청에서 시위가 있었고 농악대를 따라 횃불행진에 들어갔다. 도청에 모여 화형식도 했다.

17일 집에서 늦게 학교에 나와보니 학교는 군인들에게 점거돼 있었다. 형(김상윤)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형수로부터 듣고 친구집으로 피신했다. 친구와 함께 시내 상황을 정탐하며 시위를 하다가 21일 오전 버스를 타고 완도로 피신했다.

전남대 교수의 여름 별장이 있던 망남리와 백부 댁에 숨어 지내다가 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완도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시위에 참여해서 광주의 진실을 알렸다. 그 시위에서 미역 가공업을 하던 故 최형석 씨(전 전남도의회 의원, 당시 완도청년회 활동)를 만났다. 이후 최 씨의 미역공장에 피신하기도 했다.

경찰 정보과 형사들이 체포하려고 했으나 당시 지역 유지였던 백부를 의식해 못하고, 대신 다른 지역으로 피신시키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최 씨의 수출용 미역을 실은 화물트럭에 숨어 부산으로 피했다. 부산 남포동에 있던 최 씨의 가게 2층에 한동안 숨어 지냈다. 며칠 뒤 다시 서울로 옮겼다. 아는 신부의 도움으로 용산시장에 있다가 경기도 양평에 있는 ‘베들레헴의 집’에 은거하며 잠사(누에) 일을 도우며 지냈다.

경찰들이 교사인 아버지를 협박하며 아들을 찾아내라고 추궁해 결국 1980년 7월 11일 자수 형식으로 구속돼 서광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 보안대 조사를 거쳐 상무대 영창에 100일 넘게 수감됐다. 10월 30일 열린 재판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겨울 감옥에서 풀려났다. 5년,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된 동료들에게 죄지은 심정으로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들 몫까지 의미있는 일을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은 1991년까지 계속됐다. 5·18 진실 규명 작업, 천주교 자료 정리와 발간, 사진과 비디오 자료 정리, 구속자 구명, 부상자 실태조사 등에 관한 일이었다.

각계각층의 끈질긴 진실규명 작업과 범국민적 보상요구에 따라 1990년부터 국가보상이 시행됐다. 1993년부터 문민정부의 개방적인 태도변화도 따랐다. 5.18관련 인사들의 피해보상금 일부와 해외 성금 등을 모아 1994년 5·18기념재단을 설립했다. 현재 맡고 있는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비상근직 이사장을 도와 재단 업무를 총괄하며 사무처를 관할하고 있다. 5·18기념재단은 5·18 민주화운동의 위대한 민주정신과 숭고한 대동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전개할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기념사업, 학술·연구·교육·문화사업, 진상규명사업, 국제연대사업 등을 한다.

이번에 35주년 5·18광주민중항쟁 기념식이 따로 열린 계기가 됐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공식 기념곡 지정 논란에 관해 김 상임이사는 할 말이 많았다. “1982년부터 2008년까지 기념식 행사에서 제창된 노래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제창에서 합창으로 바뀌었다. 그 노래가 북한 영화의 배경 음악으로 사용됐다는 것도 기념곡 지정 거부 사유가 결코 될 수 없다. 우리 노래를 북에서 가져가 쓴 것이지 우리가 북에서 가져온 것도 아니고 또 쓰라고 부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통합을 저해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진짜 이유는 전라도를 고립시키고 정권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라고 했다.

고향 완도에 대해 김 상임이사는 “어렸을 때부터 완도는 풍요로운 곳이란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 집에서 하던 김 건장이 떠오른다. 김, 미역 등을 생산하고 포장하는 일이 생각난다. 고향은 늘 일이 많아 바빴던 것으로 안다. 풍요로웠던 탓에 세상의 흐름에 늦고 적극적이지 않았던 곳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김 상임이사는 1980년 5월 당시에 완도에서도 5·18과 관련한 시위가 있었고 그것을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던 만큼 우리 지역 관련 5·18사적지 지정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관련 자료(증거와 증인 등)와 사실이 확인되면 고증을 거쳐 사적지로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감옥에서 출소했던 1980년 겨울 어느날, 김 상임이사는 완도청년들로부터 고향 완도에 초대받고 내려왔던 35년 전 일을 기억했다. 최형석 전 도의원과 청년회원들이 감옥에서 출소한 자신을 격려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아직 삼엄했던 당시 상황에서 20여 청년들이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좋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간직한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박광태 전 광주시장도 만났다.

김 상임이사가 피신 왔다 참여했던 완도읍내 시위를 주도했다는 완도 청년회원들. 5월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완도읍 버스터미널 부근에 모였던 그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더 늦기 전에 김 상임이사를 초대해 그때 열정과 울분을 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거 같다. 목숨 건 항쟁에서 살아남아 감옥에 갇혔다가 출소한 5·18 청년을 초대해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았던 따뜻하고 넉넉했던 사람들이 완도 청년 아니었던가. 오늘의 완도 청년은 어떤지 생각해 볼 일이다. /박남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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