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거북시장에서 112번 버스를 탄다. 신현 치안센터 정류장에서 밤색 외투를 입은 여자 하나 차에 오른다. 버스는 빈 좌석이 많다. 여자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주저 없이 빈자리에 가 앉는다. 거침없는 여자의 태도가 부럽다. 나는 버스에 오른 그 짧은 순간에도 어느 자리에 앉을까 계산하며 머뭇거리고 주저 한다. 빈자리가 하나뿐이라면 나 또한 선택의 여지없이 앉을 것이다. 하지만 자리가 두 개만 남아도 저울질하느라 내 머리는 복잡해진다. 대체 짧은 거리를 가는 시내버스 좌석 하나 잘 잡았다고 얼마나 큰 이득을 얻겠는가. 그 사소한 선
정표(鄭杓)가 말하기를 “황정경(黃庭經)은 왕희지가 쓴 것이 아니고 영승(永僧)서호(徐浩)의 무리가 쓴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상세히 검토하고 한말일 것 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믿지를 못하겠다. 옛 서첩으로 훌륭한 것은 전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없었는데 내가 옛날 찰방(察訪)이서(李敍)의 집안에서 본 악의론(樂毅論)과 근래 상서(尙書) 민성휘(閔聖徽)집안에서 얻은 상찬(像贊)은 모두 지극히 뛰어나고 교묘하였다.내가 일생동안 필력을 얻은 것은 오로지 이두서첩에서였다. 대저 옛 서첩은 모두 여러 번의 번모(飜慕)를 거
완도군청 해양수산과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최근 5년 동안 수산보조사업 총 19건에 18억4천9백2십만 원의 예산을 사용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 회계연도로 이월까지 하고서도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당했다.또한, 2011년에는 해파리 구제장비 지원 사업도 같은 맥락이다. 예산 2천만 원을 확보해 놓고 사업추진을 못하고 다음 회계연도로 사업비 전액을 이월하기도 했다.전남도에서 공개한 감사결과 자료를 보면 완도군 해양수산과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수산분야 민간자본 보조사업을 추진하면서 각 단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언론인 전문화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 연수’를 실시했다. 는 국내외 도시재생 추진 사례를 통해 그 의미와 정책 방향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편집자 주- ‘생태교통 수원’ 낙후 도심 부활 신호탄...행궁동 경관 일신, 공방거리 팔달문시장 특수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생태교통 수원2013’이 수원화성 성 안 마을 원도심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수원시는 9월 한 달
풀등에 발을 내리자 곱고 부드러운 모래땅이 나그네의 지친 몸을 받아 준다. 풀등은 신기루가 아니라 바다의 오아시스다. 예전에는 썰물 때면 풀등의 웅덩이에 갇힌 꽃게, 새우, 광어 등을 거저 주어 담을 수 있었다 한다. 서해 바다에 물고기들이 넘치던 때 이야기다. 오늘 풀등은 바다의 사막처럼 황량하다. 겨울 동안 풀등을 떠나 있던 거주자들 대부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수온이 높아지는 5,6 월이면 그들이 다시 몰려 올 것이다. 그 때는 깊은 바다 속에서 추위를 피하던 골뱅이도 풀등으로 올라와 몸을 숨기고 방게들도 무리지어 다닐 것
삼분비(三墳碑)의 가볍고 거친 획 구사나 무디고 속된 결구같은 것은 역산비(嶧山碑)와 같은 자리에 둘 수 없으니 이양빙 집에서 수레를 끄는 종도 마땅히 삼분비처럼 쓰지는 않을 것이거늘 하물며 지금 세상 사람이 이것을 본받아 쓴다면 그런 사람은 까마득히 미치지 못할 자일 것이다.미불(米芾)이 말하기를 “글씨는 예서가 성행함에 이르러 대전(大篆)의 옛 법도는 크게 파괴 되었다. 전서와 주서는 각기 글자의 형태에 따라 크거나 작게 썼기 때문에 온갖 사물의 형상을 알 수 있어서 각각 글자 자체만으로도 (형상에 나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을 앞두고 언론인 전문화 교육의 일환으로 ‘역사와 문화를 활용한 도시재생 연수’를 실시했다. 는 국내외 도시재생 추진 사례를 통해 그 의미와 정책방향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정부, 특별법 시행 목전 ‘도시재생 본격화’ 전국 지자체중 절반가량인 128개 지자체가 도심쇠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치할 경우 도시 내 불균형과 도심공동화 심화를 물론 사회적 갈등 및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도시재생사업단을
완도군이 사업자에게 지급한 민간경상보조금이 목적 외에 사용되고 정산서를 허위로 작성한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가 감사에 적발됐다.또한, 민간경상보조금에 포함되어 있는 비용 외에도 군비로 또 지출, 중복 집행하여 회계질서를 문란 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을 당했다.전남도에서 공개한 감사결과 자료를 보면 완도군은 ‘2012년 수산경영 대상평가’ 상사업비(우수상)을 지원받아 ‘2012 전복수출 MOU활성화 선진지 견학’을 위하여 2012년 제3회 추가경정예산에서 확보한 후 당해 연도 12월 26일에 00전복(주)에게 민간경상 보조금 2
지금 2세의 조서를 새긴 것을 보면 필의가 더욱 연약하고 느슨하여 전보다 크게 못하니 위작 가운데 또 위작이 있는 셈이어서 한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두보(杜甫)의 노련한 안목으로도 그 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대추나무에 옮겨 새긴 것이 살쪄서 참모습을 잃었다”라고 하였으니 왕세정의 무리가 깨닫지 못한 것을 어찌 힐난할만한 일이겠는가?무릇 획을 긋는 법은 획의 처음과 끝, 중간부분 할 것 없이 단지 균일하게 힘을 써서 밀고 나가다가 바야흐로 힘을 써서 획이 끝나는 부분에 이르면 그칠 따름이니 전서, 예서,
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객승은 아무 말 없이 돌아갔다. 구지 선사가 돌아오자 동자승은 자초지종을 이야기 했다. 그러자 구지 선사가 물었다."그 스님에게 했듯이 나에게도 대답 해 보거라. 불법이 무엇이냐?"동자승은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구지선사는 칼을 꺼내 동자승의 손가락을 싹둑 잘라 버렸다. 동자승은 비명을 지르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선사가 동자승을 불러 세우고 다시 물었다."그래 불법이 무엇이냐?"동자승은 순간적으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였다. 아차, 그런데 손가락은 이미 잘리고 없지 않은가? 그 순
인천시 옹진군 자월면에는 두 개의 이작도가 있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 자월도에서 배를 타고 소이작도로 건너왔다. 이작도(伊作島)의 옛 이름은 이적도(伊賊島)였다. 후일 이작도로 바뀌었다. 자월면 사무소가 발행한 안내서는 이적도란 이름이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전쟁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숨어 살며 해적질을 한 데서 유래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해적들의 집터와 무덤이 섬의 북쪽 휘청골에 남아 있다고 전한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 휘청골로 간다. 휘청골 해변은 작고 옹색하다. 큰 무리의 해적이 숨어 살기는 좁아 보
진나라 때는 일찍이 역산비문이 없었다. 그렇다면 시황기(始皇記)에서는 어찌하여 추(鄒) 땅의 역산에 올라가 돌을 세우고 노(魯)나라 여러 선비들과 돌에 새길것을 의논 하였다라고 하였는가? 말하자면 단지 돌만 세웠을 따름이니 새길 것을 의논하고 결과적으로 새기지는 못했던 것이다. 과연 글을 새겼다면 태사공(太史公)이 역산비보다 뒤에 나온 6송(六頌)은 모두 사기(史記)에 기록하면서 이 비문을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 순수(巡狩) 할때의 첫째 비석인데 어찌 기록하지 않았던가? “역산비”는 애초에 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아침 출항할 때까지만 해도 파도는 잔잔했고 바람은 미풍이었다. 포구에 나간 여자는 고기잡이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돛을 달고 나갔던 어선들이 하나둘 서둘러 귀항했지만 끝내 남편의 배는 보이지 않았다. 사나운 폭풍이 섬을 삼킬 듯이 달려들었다. 걱정과 불안에 여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녘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에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은 자신이 죽도의 굴에 있다고 이야기 했다. 꿈을 깨고 난 뒤에도 현실처럼 생생해 아내는 몸서리를 쳤다.연 이틀 폭풍이 불다 바다는 다시 아무
삼척만호 김인우는 안무사의 직을 받고 울릉도로 향했다. 안무사는 해도에 숨어든 자들을 뭍으로 압송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들었다. 연례 행사였다. 안무사는 전함 두 척에 싣고 온 군사들을 이끌고 울릉도로 진입했다. 안무사는 황토구미를 주둔지로 삼고 섬 곳곳을 뒤져 은둔한 자들을 빠짐없이 잡아 들였다.뭍으로 돌아가기 전날 밤, 안무사의 꿈에 동해의 해신이 나타났다. 해신은 동남, 동녀 하나씩을 두고 가라고 명했다. 다음날, 유학을 신봉하는 안무사는 해신의 명을 무시하고 배를 출항시켰다. 해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은 지상의 신인
송나라 고종(高宗)이 말하기를 “선비들이 왕왕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에 각기 일가를 이루고도 여러 서체에 두루 통하지 못한 경우가 있으니 대개 각 서체의 체세(體勢)가 만가지를 달라도 그것을 쓰는 원리는 하나이다. 진실로 그 도를 얻으면 진서와 예서에서 터득한 것을 해서에 쓰고 또 행서와 초서에 쓸 따름이다.만약 다섯가지 서체의 필의가 본래 같지 않다고 생각하며 번번이 그 필의를 바꾼 뒤에 다섯 서체의 필의에 통고하고자 한다면 또한 글씨를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해서에 능하면서 행서와 초서에
유엔군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11월 27일 거제도 360만 평의 땅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인민군 15만, 중공군 2만 명, 여성 포로와 의용군 3천 명 등 17만 3천 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수용소 안에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가 함께 수용됐다. 포로 수용소장 F.T.도드 준장은 포로들의 본국 귀환을 포기시키려고 협박과 고문을 일삼았다. 이에 포로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수많은 포로들이 살해됐다. 그 과정에서 수용소장이 감금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그 후 일부 포로들이 인근의 추봉도, 용초도 등으로 분산 수용됐고 포로 수용소장은
근래에 비록 이런 일은 하지 않으나 만약 종요와 왕희지의 훌륭한 서첩을 구한다면 때때로 다시 임서하여 모방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근세 사람들은 거칠고 간략한 것을 좋아하고 자세하고 치밀한 것을 싫어하여 드디어 체본을 임서할 때 단지 그 필의만 터득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글자 모양을 같게 쓰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간혹 자기가 일삼는 것이 지나치게 구속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스스로 별도의 곁길로 달려가서 옛 사람의 영향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도 하니 다시 어찌 그 필의(筆意)를 체득하겠는가?또한 이들이 옛
"사실이 너무 잔혹하지 않고 꿈이 너무 비현실적이 아닌 나라에서 살았으면"(버나드 쇼, '존 불의 또 하나의 섬')통영 항 여객선 터미널 부근 식당, 나그네는 밥상이 나오기를 기다린다.주인은 점심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메뉴는 '생선 정식' 하나뿐이지만 식당은 늘 만원이다.밤이면 식당은 밥집의 간판을 접고 '다찌' 집으로 변신한다.다찌 집이 돼도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메뉴는 따로 없다.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유일한 메뉴.술은 맥주나 소주 불문하고 무조건 한 병에 만
그 뒤 내가 윤순을 찾아가니 윤순은 책상위에서 미불의 글씨를 뽑아 보이며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반드시 결구를 고상하고 빼어나게 하고자하여 세속 사람들의 안목에 합치되지 않았으니 이 노인의 글씨 또한 한글자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대개 서도는 세속 세속 사람들의 이 뜻을 알고 재주 또한 이렇게 하기에 족하나 다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매우 고루하여 필법을 알지 못하니 반드시 글씨의 모양이 지극히 고와야 비로소 좋아하기 때문에 세속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어 예쁘고 고운 글씨를 쓴다.내가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성취한바가 마땅히 여기
다음날 아침, 가장 연장자인 잠수가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애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으면 모두 물에 빠져 죽는다."고 했다. 테우의 주인 이씨 부인 또한 같은 꿈을 꾸었다. 잠수들은 애기업개를 놓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씨 부인은 기저귀 하나를 걸어놓았다. 테우에 사람들이 오르자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이씨 부인은 애기업개에게 기저귀를 걷어오도록 시켰다.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테우는 떠나갔다. 애기업개는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테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3년 동안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마라도에 가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