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의 결과 엄청난 후폭풍에 직면한다.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왜구들의 반격을 피해 칠산바다를 건너 서해 군산앞바다 선유도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명량에서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결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전혀 남아있질 않았다. 무기없이 보급없이 싸울 수는 없었던 것이고 이순신의 패배는 바로 조선수군의 궤멸과 직결되는 아주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칠산바다 앞까지 추격한 왜구들이 거센 칠산바다를 건너지 못해 더 이상 이순신을 추격하지 못하게 되자 이순신은 다시 남하하여 목포 앞바다 보화도(현 고하도)에
관광은 한마디로 종합예술이다.관광이 종합예술인 까닭은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예술, 먹거리, 인문과 자연 등 모든 영역과 연결되는 만큼 완도군 관광과의 경우엔 각 분야의 여러 사람들과 공조할 일이 많은 곳이다. 특히 관광과는 여러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협조가 절대적이고, 관계자들에게 끊임없이 부탁하고 설득해야 그야말로 올라운드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지금 침체된 완도 관광을 일으키는 데는 관광 인프라를 마련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자기가 평소 활동하는 범위를 벗어나 새로운 지역을 방문하고 소비함으로써 현지 주민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은 이순신의 죽음과 함께 끝났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왜구들이 부산포로 처들어와 불과 2개월만에 한반도 전국토를 유린하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하여 조선을 떠날 준비까지 하였다. 그해 12월 중국 명나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라는 논리를 내걸며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 대항하여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논리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이어 다시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에 선조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며 내내 감사해 했고 중국을
완도읍 주도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줄곧 주도리에만 살았다는 주도리 이장님 김해덕씨(64세). 3년동안 주도리 이장을 맡았던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장직을 그만두자 주도리 마을사람들은 주도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이장직을 해야 한다며 끝끝내 그녀를 이장으로 선출했다고 한다. “저는 주도리에서 태어나 지금껏 줄 곧 주도리에서만 살았어요. 예전의 주도리는 완도의 명동이라 불리울 정도로 번성했었어요. 은행, 시장, 병원 관광서까지 밀집되어있어 완도의 중심지였죠” 수십년전 성황했던 주도리를 회상하며 김 이장은 추억에 잠겨 말을 이어갔다
“아내가 깨끗한 쑥을 캐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땅을 알아봤는데 지역신문에 200평 땅이 나온걸 보고 무작정 찾아갔어요. 마음에 쏙 들더라고요. 계약하려고 알아보니 200평이 아니라 1,200평이었어요. 신문에 ‘1’자가 누락되서 게시가 됐다 하더라고요. 땅은 맘에들고 200평만 안되겠냐고 하니 절대 안된다고 해서 1,200평을 모두 사버렸어요. 그게 벌써 15년 전 일이네요” 운명이란 게 이런걸까? 소소하게 아내와 쑥이나 캐고 주말농장 정도의 조그만 땅을 갖고 싶었는데 대책도 없이 덜컥 1200평이라는 큰 땅의 주인이 되어버
1. 당리 삼현비각(三賢碑閣)]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세금 폐단에 죽음 무릅 쓴 상소 올려궁방은 조선시대 왕실의 일부였던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 독립한 궁가의 통칭하는데, 궁실은 왕과 선왕의 가족 집안을 뜻하며 궁가는 역대 여러 왕에서 분가한 왕자·공주들의 종가를 의미한다. 조선전기 후궁·대군·공주·옹주 등의 존칭에 지나지 않던 궁방은 직전법 폐지로 왕족에 대한 생계대책이 현안이 됨에 따라 17세기 이후에는 재정운영의 주체로서 역할이 두드러진다.영조 3년(1727년)때 숙종의 여섯째 아들 연령군의 사저인 연령군방에 청
광윤은 신비롭기만 했다. 심장을 살살살 살살살 거리는 게 마치 자신이 황금빛 비단 물결 위에서 노니는 듯 했다. 붉은 노을이 내려온 것도 아닌데 어쩜 저리도 황홀한 빛이 생겨났을까?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니 온몸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금빛 잉어가 저 혼자서 물결 위를 살랑거리며 주위를 온통 황금빛으로 만들고 있었다.그 빛에 홀렸는지 광윤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벌리며 물 속으로 들어갔다.그러자 신기하게도 금빛 잉어가 놀래지도 않고 자신의 품안으로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아! 평생에 이리도 상스러운 꿈은 처음이다고 생각할 쯤 어제 저녁,
셋째날. 오늘은 이번 트레킹의 목적지인 강진 곰파까지는 3~4시간 정도 걷는 비교적 쉬운 일정이다. 이른 아침 방에서 마당으로 나와 건너편 설산을 올려다본다. 어둠을 밀어내고 있는 여명에 하얀 설산은 점차 황금빛으로 물들어간다. 그 아래로는 땅위를 휩쓸고 간 토석이 무심한 듯 널브러져 있다. 대원들이 하룻밤 묵었던 롯지의 주인인 28세의 젊은 아줌마는 애끊는 사연을 품에 안고 있었다. 지진 때 학교 문제로 한 아이를 다른 마을에 데리고 가있어 용케도 참사를 피했는데, 남편과 다른 아이는 집에 머물고 있다가
지난주 본지는 ‘광주-완도, 광주-대전 구간보다 5천4백원 비싸’란 기사를 통해 요금체계 차이 때문에 더 먼거리보다 광주-완도 구간 요금이 많이 비싸 불만이 크다고 보도했다. 그런데, 광주-완도 구간 가운데 3구간이 새도로로 개통됐음에도 불구하고 재실측을 하지 않고 기존 운행거리 실측자료를 그대로 관행적으로 적용해 와 논란이 되고 있다.지난주 보도에서 본지는 광주-완도구간이 운행거리 141.7km, 1km당 운임요금 116.14원 적용으로 요금이 16,500원이란 것을 전남도와 금호고속 양측에서 모두 확인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후
지난 5월 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2016 완도장보고수산물축제’가 개최됐다. 정부가 6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한 덕분에 우리 완도군에 행운이 따르기도 했고, 도중에 비가 내렸지만 하루 밤 사이에 그쳐 축제 일정에 큰 차질은 없었다.2016 장보고수산물축제 평가와 특징신우철 군수는 이번 축제가 성공적이라고 축제 기간 중 수차례 평했다. 그는 “전남 22개 시군 중 여러 곳에서 동시에 축제가 개최되고 있지만 우리 완도에만 최고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고 말했고, “인물 축제와 경제 축제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고도 평가했다. “지난
미역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갓 새끼를 낳은 어미 고래가 어떤 사람을 삼켰는데 고래 뱃속에 미역이 가득한 걸 목격한 후 살아 돌아 온 그 사람에 의해 고래가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또 ‘고래가 새끼를 낳으면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한다’는 당나라 때 기록도 있다. 비록 지어진 이야기겠지만 미역이 산후 여성의 건강에 좋다는 것을 뒷받침한다.2017 완도국제해조류박람회를 준비하는 완도군이 매년 5월 8일 어버이날을 ‘미역 데이’로 정해 어머니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이런 같은 이유일 것이다.예나 지금
녹조류에 속하는 가시파래를 완도 사람들은 흔히 ‘감태’로 부른다. 본래 갈조류인 감태와는 다른 종이다. 감태(가시파래)의 가늘기는 녹조류인 매생이와 비슷하지만 매생이만큼 부드럽지 않다.연녹색을 띠는 감태는 민물의 유입이 많아 영양이 풍부하고 오염원이 없는 갯뻘 위 작은 돌, 조개, 나뭇가지 등에 붙어 자란다. 보통 12월부터 2월 사이에 가늘고 길게 자라며 수 미터까지 큰다. 여건이 좋으면 매일 채취할 정도로 성장 속도가 왕성한다. 감태를 흔히 ‘맨다’고 한다.섬유질, 무기염류와 비타민이 풍부한 감태는 그 향기와 맛이 독특하다. 말
대형 마트, 인터넷 쇼핑, 택배 등으로 골목 상권이 붕괴된 지 오래다. 5일장의 약화는 당연한 일이다. 이런 틈새를 비집고 ‘대안장터’를 표방한 지역장들이 여럿 생겨났다. 이들 대안장은 생산자와 소비자 간 직접 대면을 추구한다.가까운 우리 주변 장흥, 해남, 강진 등지에서도 이런 장들이 열리고 있다. 완도에서도 지난 8월 장보고 웃장이 처음 문을 열었고 오는 26일 5번째 열린다. 웃장이 바닷가 바위 틈에서 피어나는 해국처럼 거대 자본의 틈새에서도 깊이 뿌리 내리고 활짝 피어나는 대안 문화장터가 되기를 고대해 본다.그런데 아직 웃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완도읍 5일장 문제에 대해 완도군은 어떤 대책과 해법을 가지고 있는가 알아보자.우선 장날 주차난 해결을 위해 주차 공간을 꾸준히 확보해 왔다. 읍사무소 옆에 주차장을 마련했다. 또 한전 직원 숙소 자리를 매입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지금은 포기한 상태다. 또 최근 들어 편도주차제를 운용해 호평받았다. 군청 직원들이 장날마다 방향을 바꿔가며 주차선에 공사장 고깔(라바콘)을 설치해 왔다. 아직까지 큰 문제 없이 잘 지켜지고 있다.또 5일장 공간이 협소해 생기는 문제로 보고 장터 부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를 위
공고지 시절(1964년)로부터 치면 완도읍 5일장은 오십 성상을 이어왔다. 완도읍 5일장은 요즘도 매번 250에서 300여 명에 이르는 장꾼들이 생계 활동을 이어간다. 그런데 완도의 큰 자랑이어야 할 전통의 5일장이 모두에게 골칫거리이자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잊을 만하면 5일장 문제가 신문에 등장한다. 무엇이 문제이고 또 그 원인은 무엇인가?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주차난이다. 상인들과 손님들 모두가 불편을 호소한다. 장날만 되면 주변 골목 전체가 혼란을 겪는다. 골목길 교통체증 해결을 위해 지난 9월부터 장보고대로에서 완도읍사무소에
완도읍 5일장의 문제와 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5일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견을 각계 각층으로부터 들어보기로 한다. 5일장이 완도의 소중한 상품으로 부활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몇차례 연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주)대형마트의 등장과 인터넷 쇼핑, 택배 등의 보급에도 여전히 건재한 완도읍 5일장의 가치는 무엇일까?완도읍 5일장은 매년 한두 차례 몸살을 앓는다. 상인들 간에 벌어지는 갈등, 장터를 이용하는 상인들과 단속하는 공무원 간에 생기는 다툼, 대로변까지 진출하려는 어물전 상인들의 문제 등
[미디어오늘 컨퍼런스] 혁신과 대안, 저널리즘의 미래.박정원 프레스바이플 편집위원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수 백건의 고소고발을 당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군소 언론이 과연 존재할까? 거론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실제로 7년여에 걸쳐 153건이나 고소고발 당하고도 견딘 언론이 우리나라에 있다. 바로 이다.타블로이드판을 주간으로 발행하는 은 지난 9월말 창간 22돌을 맞았다. 신문발전기금까지 압류하는 치졸한 단체장 처사에 맞서면서도 현재까지 신문 발행은 물론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wandonews.com)
완도신문 창간 때를 회고하신다면?당시 지역신문이 전혀 없고 지방지와 중앙지만 있던 시절에 지금 고인이 된 이경국 전 대표가 지역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대다수 군민들이 지역의 오밀조밀한 삶의 얘기들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지역신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지역신문이 지역 사회에 활력을 이끌어주고 지역민들의 융화 단결과 의식고취에 보탬이 될 거라 생각했다.창간 당시 어떤 사회 활동을 했는가?청년회와 구도회 활동을 함께 했다. 지역 신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거라 믿고 청년들이 적극 참여했으며 모금 운동도 하고 홍
더 많은 발전 기대 할 터 그 누구보다도 완도신문을 사랑하는 독자입니다.매주 금요일 신문을 받아 보면서 이 많은 기사들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미치면 기자들이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그동안 지역 언론의 역할을 다해 온 완도신문은 우리군 발전은 물론 군민들의 여론형성과 소통에 기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완도신문이 지역의 문제점 지적과 함께 개선 대안도 함께 제시해 줄 수 있는 수준 높은 지역신문으로 거듭나길 기대합니다. 군민들이 공감하고 사랑하는 신문, 읽고 싶은 신문, 없어서
위대한: 전 국민이 세월호의 침몰을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당연히 전원 구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결과는 한명도 구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구조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입니다.박남수: 구조를 못한 것이 아니고 안한 것이라면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겠죠. 지금 상황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가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때입니다.김영신: 국가의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받은 정권이 한명이라도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유가족들에게 분양소나 팽목항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국가의 악마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