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일을 시작해서 저녁까지, 겨우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결속(結束)이라고 하여 낮에 말려 놓은 김을 판매할 수 있도록 다듬고 묶어서 놓은 후에야 겨우 잠을 잘 수가 있었다.다음날 쓸 김을 뜯어는 왔지만 혹 파래가 섞여 있으면 파래를 골라내어야 한다. 파래가 섞여 있으면 값이 더 떨어지기 때문에 전등불도 없는 호롱불 밑에서 그 일을 다 마치고 나면 자정에 가까워졌다.잠은 겨우 대략 네다섯 시간 밖에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제 말려 놓은 김을 가족 중 누군가 새벽에 판매를 하러 읍내로 가야한다.판매를 하고 온 사람은 바로 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던가!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게 인지상정이다. 오동나무 자색 꽃 짙게 물들고 밤새워 소쩍새 울면 본격적인 농사가 시작된다. 한국인들은 바쁜 농사철에 고향 생각이 절로 든다고 한다.고향의 어머니, 산새 소리, 들꽃 향기를 떠올리며 향수에 젖어 있을 무렵이면 6월 산야에 찔레꽃 향기가 그윽하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산과 들녘 지천으로 핀 찔레의 하얀 꽃잎이 흩날리고 나서야 전원 속의 집들 담장마다 붉고 탐스러운 찔레꽃이 가득하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장보고에게 신라의 흥덕왕은 만인의 백성을, 신무왕은 식읍2천호를, 문성왕은 진해장군으로 봉하고 장복을 내렸다. 그럼 식읍 2천호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신무왕이 식읍 2천호를 주고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 진해장군(鎭海)에 봉했다. 이는 분명 기록에 나와 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낙동강 하구의 진해(鎭海)를 생각하는 것이다.낙동강 하구의 넓은 진해를 장보고에게 준 것으로 보고, 거기를 관할하는 장군으로 봉했다고 생각한다. 진해(鎭海)란 말은 청해(淸海)와 아주 어울리는 말이다.완도에 땅을 주었다면 청해장군
옛기사에 해태란 김을 말한다. 해태라고 하기 전에는 해의(海衣)라고 했다. 바위에 붙어 자라는 김이 바위를 덮고 있어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바다 옷이라고 했을 것이다. 이 글 제목의 해태왕국 완도는 1937년 12월 16일 자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해의에 대한 최초기록은 1425년(세종 7) 경상도 지리지에 토산품에 해의(海衣)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고,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에 광양 특산품으로 기록되어 있다.해태란 이름은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다. 김이란 이름은 광양에 사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제일
신라군사편제에서 국왕의 직접적인 필요에 의해 구성된 시위부의 소속된 군사의 하나로 卒이 만들어졌지만 정원은 117인이었으니 장보고에게 1만명의 졸(卒)을 주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상황인 것이다. 신라골품제에서도 졸은 신라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17등급에서 12등급의 신라골품들만이 할 수 있는 벼슬이었다. 조선시대 양반과 같은 지배계층의 직이었다. 이런 사람 1만명을 주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사실이 그렇다고 주장한다면 신라사관 학자들이 한 말이 맞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에게 1만의 군사를 주었다고 한다면 장보고는 흥덕왕(828
오월이면 지인으로부터 대흥사 인근의 차를 선물 받는다. 그런데 차 마시는 일에 익숙지 않아서인지 매번 책상에는 묵은차가 봉지 째 쌓여있다. 일일이 손끝으로 찻잎을 따서 덖음해 만든 공력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꼭 차를 우려 마셔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커피나 다른 음료처럼 다루기 편했더라면 ‘녹차’라고 부르는 차를 자주 마셨을까? 생각해보니 왠지 번잡스럽고 손이 가는 우리차는 그래서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응송 스님이 차를 마셨던 모습을 나도 모르게 습득했던
신분제 질서라는 골품제의 거친 바다를 헤치고 청소하겠다는 그의 이념은 당시 청해진 부근에 거주하던 많은 사람들의 동조와 호응을 얻어내었고 적극적으로 장보고의 이념에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엄청난 세력권을 만들어냈다. 완도 청해진뿐만이 아니라 전북 부안과 지리산, 하동, 남원, 고흥, 장흥, 강진, 해남에 이르는 구백제권 전역을 장보고의 청해진 권역으로 만들었다. 수많은 억눌린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찾아 장보고에 호응했다. 그야말로 인간의 삶과 생명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진하고자 할 때 고향이어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그 길에 대한 믿음이다.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떤 순간보다 절박한 건 그 길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치열함이란 확신의 과정에서 유일한 무기이며 이로써 나머지는 모두 소거한다.모든 에너지를 그것에 퍼붓고 있기에 누구도 이길 수 없고 누구에게도 져 줄 순 없다. 어디에도 이룰 수 없지만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때 사무치는 바.이 호흡을 이해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틀렸다고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것. 본질의 핵심 안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 거추장스럽거나 가로 막는 건 모조리 버리거나 깨 버린
누군가를 기억하고 그의 사상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 사람,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이다. 요즘 내가 즐겨 듣는 그의 강의에서 보면 그처럼 스승의 은덕에 감사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교훈으로 삼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가 마음속에 늘 그리워하는 스승은 누구일까? 그는 완도읍 죽청리 출신 응송 스님인 박영희다. 한학에 능통했던 29세 꽃다운 나이에 박동춘은 응송에게서 초의선사의 다법을 배웠고, 아직까지 대흥사의 다맥을 유지했다고 자부한다. 일평생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은 참으로 고귀한 일이다. 그것은 각박한 세상에서 사람들 가슴
청해진제국은 장보고 혼자만의 제국이 아니다. 제국을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완도 사람들이었다. 청해진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 장보고이지만 청해진제국의 구성원들의 대다수는 거의가 완도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828년 청해진을 설진할 때의 군사 1만명도 신라정부가 파견한 군대가 아닌 장보고 휘하의 제국민을 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는 군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상단(商團)을 만든 것이다. 신라왕실로부터 공인을 받는 명분은 해적소탕과 노예근절이었던 것이다. 그 명분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분명히 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완도수목원을 빠져나와 죽청리로 향했다. 미심쩍은 것이 있어서 친절한 완도군 직원에게 정보를 전달받고 다시 군외면 불목리에 있는 청해진 다원을 찾았다. 장보고 유적지를 지나 구불구불한 옛 도로를 유유자적 드라이브하면서. 거의 30년 만에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버스를 타고 완도를 찾을 때마다 외부인의 눈에 비친 바다풍경은 늘 신선했다.명절 때 고향을 찾거나 외지를 다녀와 이곳을 지날 때마다 완도사람들은 얼마나 가슴 설레었을까? 생각하니 바다는 지역의 풍성한 자원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바다가 보이는 유휴지에 다원
장보고를 암살한 바탕에는 청해진제국이 이룩한 해상무역을 통한 경제적 부를 신라왕실이 독점하고 나아가 스스로 경영할 수 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제거했고 장보고 제국을 이어받아 해상무역에 필요한 생산력을 유지하고 계승해나갈 수 있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관계에서는 커다란 패착을 두었던 것이다. 바로 골품제 신분제 노비에 의존한 생산관계에서는 제대로 된 경쟁력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골품제를 강화하고 신분제를 강화하여 신라귀족들의 기득권을 보호 유지하고자 하는 한, 장보고의 청해진을 이어받은 새로운 세계는 결코 열
완도를 찾은 독서대통령 김을호 교수.그는 독서란 취미가 아니라고 했다.독서는 1. 생존 독서 2. 몰입 독서 3, 극한 독서 4, 목적 독서(의식 독서)라고 말했다.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는 사람.책을 읽고 쓰는 기록엔 독후감과 서평이 있는데, 독후감이 나의 감상문이라면 서평은 책에 대한 공정한 평가라고 했다. 대표적인 서평가로 빌 게이츠를 뽑았다.김 교수는 "책장의 마침표는 책장을 덮었을 때가 아니라, 책장을 덮고 서평을 남겼을 때"라고 강조했다."우리의 기억은 오래가지 못한
완도학(莞島學)이 되기 위해서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기록뿐만이 아니라 사료적인 물증이 필수이다. 단순히 비밀로 분류되어 신(神)만이 안다는 논리나, 말이나 글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로는 완도를 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 최대 전성기가 장보고 청해진제국이 혁파된 25년후에 이루어졌다.결국 장보고 청해진제국의 경제적 파급효과와 영향력이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요인을 찾아볼 수가 없다. 신라에서 대단위 금광이 발견된 것도 아니고 어떤 나라가 신라에 엄청난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니,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간극문화 예술의 힘으로 극복해 차마 원교의 채취를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이번 한 주간도 신지도에 머물기로 했다. 아니, 원교의 마음이 그리움의 화신이 되어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신지도 어디를 가더라도 내 눈에는 온통 원교 이광사의 발자취만 보일 뿐이다. 명사갯길을 걸어 봐도, 동고리를 지날 때에도, 신지도 어디에나 원교의 채취가 느껴질 정도였다.지난 28일 새벽, 신지도 일대를 탐사하다 다시 들려본 원교 적거지는 온데간데 없이 빈터만 남았다. 신지중학교 담벼락 리모델링은 거의 끝났고
국어사전에서 과학이란 “사물의 현상에 관한 보편적 원리 및 법칙을 알아내고 해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체계나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에는 물리학, 수학 등 자연과학에만 학(學)이란 말을 붙였으나 현대에는 보편적 가치의 원리와 법칙 즉 문화와 논리라는 개념으로 인문학, 사회학, 역사학 등과 같이 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그래서 완도가 우리 사회와 자연에 미친 영향력과 가치, 역사의 근간이며 부를 창출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한 문화를 형성했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여 완도학(莞島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섬 문화 탐방기획 유배와서 원교 이광사는 그의 자녀들과 신지도에서 함께 살았다. 큰 아들 긍익은 조선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고, 둘째 아들 영익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조선 최초로 양명학 사상체계를 이룬 정제두의 학통을 계승했다. 그들의 활동에서 보면 원교 이광사가 그리다 만 잉어 그림을 완성시킨 가 여러 의미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한다. 부령에서 낳은 여식은 원교를 특별히 잘 따라 이를 각별히 여긴 부친은 친히 글공부를 시켰지만, 당시 신분제도 때문에 서녀라는 이유로 그 기록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인간에게 문화는 삶이자 생명인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가 없다면 상호간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삶을 영위하는 문화 자체를 유지하고 계승하는 방법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도 역시 소멸한다.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완도는 정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았다. 지금도 살고 있지만 먼 옛날 6천년 전부터 선사시대 신석기 문화가 존재한다. 단군이 개국하기 1,500여년 전에 이미 완도에서 일어난 일이다. 완도 체도에서 50km 떨어진 여서도란 섬에 신석기 문화가 존재한다. 여서도(麗瑞島)는 완도군
1599년 1월 11일 진린 도독은 이순신의 장례식을 엄수했다. 그리고 등자룡의 유해와 이순신의 유해를 임시안치했던 월송대에서 파서 서울과 아산으로 각각 향한다. 등자룡은 선조 임금의 참석하에 1599년 2월 8일 장례식을 치루고 유해는 명나라 군대와 함께 명나라로 건너가 중국에 묻힌다.서울에서 선조와의 만남과 명나라 군대의 출발 일정 때문에 이순신의 유해를 직접 가지고 아산으로 가지 못하고 대신 처남인 두사충에게 장례를 부탁하고 지금으로 치자면 5천만원 상당의 백금(白金數百兩)을 부조한다. 두사충은 매형인 진린의 뜻을 받들어 이순
섬 문화 탐방기획 편집자 주> 본 섹션에서는 완도 섬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섬 문화 탐방 “완도, 어디까지 가봤니?”를 기획연재하고자 한다. 완도 권역별 섬의 역사와 문화,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관광자원을 발굴하여 “완도, 어디까지 보았나?”라는 질문을 스스럼없이 던지며, 우리가 알고 있는 완도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무엇이 진짜 완도인지를, 완도가 품고 있는 모든 것을 독자에게 생생한 소식으로 전하고자 기획됐다. 철부선 타고 주도(珠島) 상록수림을 보면서 들뜬 마음에 신지도에 있는 명사십리를 찾았던 기억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