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신지도 명사십리 이벤트 광장에서 해맞이 행사가 열렸다. 보통은 지역의 명산이나 바다 한가운데로 배를 몰아 해맞이를 기획하겠지만, 올해는 달랐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앞섬에 가려 떠오르는 태양을 조금 더 늦게 보는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그곳으로 정했다.전국 최초로 개관한 해양치유센터를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이 컸기 때문이다. 완도가 자랑하는 명품 해변에서 열린 이번 행사에는 반갑게도 해맞이 인파가 해변 가득 모였다.청해진열두군고의 길놀이는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렸고, 제각기 마음에 간직한 새해 소망과 농악
완도군립도서관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책로를 걸었다. 예전에도 몇 번은 다녀갔지만 이곳은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고향을 찾은 느낌이랄까. 옛것이나 빈티지 타입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보는 내내 쌓였던 긴장감이 해소되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빗돌에 깃든 사연을 알아가는 것도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30년 전 여행지로 즐겨 찾았던 느낌, 골목길이 보이고, 시간은 여전히 그때 그 장소에 머물러 있다. 산책길을 걷다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마을전경과, 주도 앞 바다와, 가까이서 들려오는
지난번 고금면 윤동마을 은행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은행나무 이야기를 쓴다. 윤동마을의 은행나무가 독립개체로 이순신 장군의 호국의 혼이 들어있다면 이번에 다루는 은행나무는 백여년된 수십그루의 은행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가을이면 은행잎 비를 내리는 곳이다. 은행(銀杏)은 원래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만 자라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자라기도 더디지만 까다로운 것은 암수 나무가 있어야 열매를 맺는 자웅이주(雌雄異株) 식물이다. 봄부터 가을까지푸르름을 자랑하던 잎은 가을이 되면 아주 샛노랗게 물들어 누구나 좋아하고, 나무는 켜놓으면 무늬가 촘촘하고
긴 수염과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던 사내. 만 명의 군사에 필적하는 용장이었던 촉나라 장수 관우는 어떻게 고금도에서 신이 되었을까? 완도의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지인 묘당도에는 관우를 기념하는 관왕묘비가 있다. 묘당도의 이름 또한 ‘관우를 모시는 사당인 관왕묘가 있는 섬’이란 의미를 붙여 새긴 지명이다.삼국지에서 관우는 뛰어난 장수이자 지휘관이었다. 중국역사서에 여러 장수가 나오지만 사당을 지어서까지 추배하는 무인은 관우뿐이다. 명대에 걸쳐 청의 황실에서는 수차례 시호를 내렸고, 마침내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호국보민정성수정익
우리지역에는 완도라는 지명으로 학명을 받은 아주 독특한 나무가 있다.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가 자연적으로 교잡하여 탄생된 완도호랑가시나무이다.이 나무는 인간이 생각 할 수 없는 도저히 이루지 못할 초 자연적인 사랑을 이루어 탄생한 나무이다. 완도지역에 많이 자생하는 감탕나무와 호랑가시나무가 오랜 시간동안 만나 자연적으로 교잡하여 탄생된 나무로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완도호랑가시나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지역에 흔한 감탕나무와 남부지역에 다양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 호랑가시나무를 알아야 한다. 감탕(甘湯)나무는 상록교목(常綠喬木)으
그대 못 보았더냐!궁복산 가득한 황칠나무를금빛 액 맑고 고와 반짝반짝 빛이 나네껍질 벗겨 즙을 받기 옻칠 하듯 하는데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상자에 칠을 하면 검붉은 색 없어지니잘 익은 치자 물감 이와 견줄소냐서예가의 경황지가 이로 인해 더 좋으니납지, 양각 모두 다 무색해서 물러나네이 나무 명성이 자자해서박물지에 왕왕이 그 이름 올라 있네공납으로 해마다 공장(工匠)에게 옮기는데서리들의 농간을 막을 길 없어지방민이 이 나무 악목(惡木)이라 여기고서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지난 봄 조정에서 공납 면제 해준 후
신지도는 그동안 명사십리해수욕장에 가려져 원교 이광사 선생이나, 송촌 지석영, 경평군 이세보등 많은 문인과 학자들이 유배와 생활하였던 곳이나 외부로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신지면 금곡마을에는 원교 이광사 선생이 신지도 유배 시절 심지(心志)를 굳게 하기 위해 심었다는 수 백년 된 낙낙장송(落落長松) 한그루가 마을 입구를 떡 하니 지키고 있다. 1755년 3월 의금부. 영조는 나주벽서사건에 관련된 죄인들을 친히 국문하고 있었다.백부(伯父) 이진유(李眞儒)와 연좌되어 의금부에 끌려온 이광사(李匡師)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었다. 이미 백
제주시는 장수도와 사수도 분쟁에서 역사적 근거 제시를 위해 탐라지와 세종실록지리지, 남사록의 기록을 내세웠다. 그러나 제주시가 주장하는 사수도에 관한 정확한 역사 기록이 불분명하다. 추자도는 원래부터 전남에만 속한 섬이었다. 근대 이전의 기록으로 볼 때, 단 한 번도 제주도에 속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제주도가 호남권에 속한 적이 몇 번은 있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의 임야조사에 의해 소안면민들이 당사리 1번지로 여겼던 장수도가 추자면 예초리 산 121번지인 사수도로 등록됐을 뿐이다. 해방후, 미군정에 의해 제주도가 전라도에서 완
아직은 찬 바람이 매서운 2월 중순.이순신 장군은 목포의 고하도에서 강진현의 고금도로 진을 옮기고 시름에 잠겨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다 잠시 꿈결을 거닐었다. ″장군, 가리포진 첨사 이영남입니다.″″장군을 생각하여 얼마 전 담근 백일주가 잘 익어서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위를 당기시기 전 목이라도 축이시기 바랍니다.″″그래? 참으로 고맙네............″평소 휘하의 참모들과 술을 즐겨마시던 장군은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건네 준 술을 마실려는 순간 스산함에 추위를 느끼며 눈을 뜨니 꿈이었다.오는 12월 16일은 임
인간은 자신과 타인의 행동에 대해 간섭하고, 불특정의 소유물에 관심을 갖고 집착하며,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삶의 덧 없는 것들을 마치 불멸의 영원한 것처럼 여기고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평정심을 찾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다. 이는 인생에 대해 바른 지각을 할 수 없게 하는데 이것이 불가에서 중생들이 느끼는 고뇌를 백 여덟가지로 말한 백팔번뇌이다. 그 백팔번뇌를 헤아리며 인간의 고뇌를 해소시키는 물건이 있으니 고승대덕들이 신체처럼 사용하는 염주이다.일반적으로 염주라고 하면 108염주를 말하는데 108개의 알을 꿰는 이유는
『加里浦上金等造』″가리포사람 김씨 등이 만들어서 바칩니다″.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가공할 위력을 가진 당시의 최신 화포 대장군전에 음각 된 글씨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전쟁이 끝난 1598년 11월까지 조명연합수군과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남해안의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조명연합군에게 비장의 화기(火器)가 있었으니 그것은 천지를 진동하며 적진으로 쏘아올려진 대장군전(大將軍箭)이었다. 완도의 진산 상왕봉(象王峰)과 백운봉(白雲峰)을 온통 뒤덮고 있는 사계절 푸른 나무가 있다.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호국(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의 진경산수화를 부르는 말이 동국진경이다. 우리만의 사상과 예술세계를 정립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사상과 예술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이전 것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사상과 예술세계로 발전시켜 새롭게 하자는 것인데, 그 중 신지도의 원교 이광사가 완성한 것이 바로 우리의 글씨 동국진체이다. 이전에 없던 것을 원교는 우리만의 사상을 도입해 새롭게 완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주자 성리학의 뿌리가 깊었던 조선 사회에서 원교 이광사는 양명학을 받아들였고, 그의 아들 영익에 의해 그것을 완성했다. 사상가 원교와 그의 아들이
조석으로 밀려드는 안개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과 섬을 한 폭 수묵화로 물들인다. 잔잔한 바다가 그려낸 회색빛 세상, 점점이 떠 있는 어선 위로 날아든 물새의 날갯짓에서 잠시나마 느껴보는 평화로움이다. 이 가을, 완도의 바다는 자연이 부려놓은 천연의 수묵화로 다시 깨어난다. 전남 국제수묵비엔날레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9월 1일부 터 10월 31일까지 진도와 목포에서 열렸다. 코로나로 인한 지난 특별전을 빼면 올해로 3회째. 비엔날레는 2년마다 열리는 국제적 미술전람회이다. 국내에는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 대구비엔날레 등이 있다
완도를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보이며 발길을 잡는 섬이 있다.완도항 앞 바다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며 그림처럼 떠 있는 섬 주도이다.우리는 주도를 바라보면서 저 노목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거나 쓰러진다면 어린 싹이 언제 자라서 그 자리를 매울까 생각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 큰 나무는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대로 두어도 되는가 생각해 봄직한 일은 아닐까? 자랑스러운 주도 앞에 서있던 주도의 설명문이 요즘 보이지 않는데 왜일까?예로부터 완도사람들은 이곳이 저울 추 처럼 생겼다하여 추섬(錘섬)이라 부르며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 영정이 논란거리다. 고금도 충무사의 영정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순신의 모습은 1953년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1973년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했고,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됐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심전 안중식이 1918년 그린 것인데, 현재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두 그림은 모두 작가의 상상화다.그동안 100원짜리 동전속의 이순신이 논란거리였다. 불패의 장수 모습이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평가를 그의 친구 서애 유성룡은 ‘단아하고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고 징비록에 기록
‘진한국마한사’. 지금 듣기에도 생소한 한국고대사인 마한의 역사를 심도 있게 연구한 소남 김영현 선생은 불목리의 ‘넌지’라는 산막에서 반평생 제자를 가르치고 집필에 몰두했다. 1961년 그의 나이 81세, 그런데도 그의 연구열은 활화산처럼 불타올라 여느 젊은이 못지않은 노익장의 기개를 펼쳤다. 그가 마지막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한국고대사를 하루빨리 출판해야함을 제자에게 알리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절박한 심정으로 애제자에게 논어를 비롯해 ‘진한국마한사’를 익히게 했다.책을 출간하기 위한 작업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모든 자료는 한자
평일도를 눈으로 스캔하며 차를 타고 돌아본다. 금일도를 간다며 나섰던 것인데, 섬에 와서보니 이곳은 금일도가 아니다. 약산 당목항에서 뱃길로 20여 분 지나 당도한 섬은 금일읍, 금일도가 아닌 평일도다.익히 들었던 소랑막걸리 맛이 몹시도 궁금했던 터라 명사십리해변을 지나고서부터 유독 소랑대교에 눈길이 갔다. 소랑대교는 아침 해를 바다가 품고 있는 것을 형상화해 디자인됐다. ‘물결이 잔잔하다’는 의미를 붙인 소랑도의 다른 뜻은 소라의 이 지역 방언이라고. 바다를 보고 있으니 ‘소랑소랑’ 물결이 잔잔하다. 소랑도 이름에 딱 어울리는 날
『마음버스』(김유 지은이, 소복이 그림, 천개의 바람)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어느 날, 곰 아저씨가 운전하는 마을버스에서 ‘ㄹ’이 사라집니다. 곰아저씨는 사라진 ‘ㄹ’대신 네모난 나무 창틀을 ‘ㄹ’자리에 붙입니다. 이제 마을버스는 ‘마음버스’가 되었지요. 분주한 아침, 사람들이 버스에 올라타 말없이 창밖만 바라봅니다. 곰아저씨는 나무 창틀이 떨어질까 봐 버스를 살살 운전하고, 사람들은 마을버스가 마음버스로 바뀐 사연을 전해 듣습니다. 왜 이렇게 느리냐며 빨리 가 달라 외치던 사람들은 사연을 듣고는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하지. 사람들
″누님 저녁이나 같이 하시죠.......″″물에 갔다와 갔고 눴써 있는디 밥 생각이 없당께.......″″그러지 말고 따뜻한 국물을 드시게 밖으로 나오세요″″아따매 비도오고 그랑께 집앞에서 만나잔께″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무렵 긍정의 아이콘 홍정옥 해녀를 만났다.뜰이 넓고 식량이 풍부해 근심걱정 없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킨다는 대정읍 무릉리.바닷가 마을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산간 마을도 아닌 온 사방이 밭으로 둘러쌓인 무릉리가 고향인 홍정옥 해녀는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났다고 한다.″밑으로 남동생이 닛, 여동생이 서이
일본에서 해상왕 장보고(張保皐'?~846)는 신(神)이 된 지 오래였다. 9세기쯤부터 전국 곳곳의 절과 신사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이라는 이름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으로 숭앙받고 있다. 당시 일본은 항해술이 미비해 중국행은 '죽음으로 가는 행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바닷길을 장악한 장보고와 신라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컬럼리스트 주> 오는 2028년은 해상왕 장보고대사가 청해진을 설치한지 12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 우리는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후예로서 진취적 기상을 드높이고 박애주의 펼쳤던 대사의 숭